주기도문을 외우지 마라
마태복음6:1-15
주류들의 오류
예수님 당시 말 그대로 주류들이 범한 오류는
율법의 정신은 빼고 껍데기만 지켰다는 것이다.
결혼은 했는데 사랑 없이 몸만 사는 것!
본질은 버리고 겉만 붙들고 사는 사람들을 경고 하셨다.
그런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엄청난 욕과 비난을 달고 사셨다.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이 그들이다.
세례요한은 독사의 자식이라 했고,
예수님은 늘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사두개인을 조심하라 했다.
천국 문 앞에서 본인도 못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하는 사람이라 경고했다.
그들을 향하여 화가 있을 것이라 경고까지 했다.
가는 곳마다 예수님은 그들을 경계하셨고,
조심하셨고,
혼내셨다.
예수님께서 안 좋은 이야기 하는 것의 많은 부분은 이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왜 이 사람들을 향하여 그렇게 많은 부분을 들여 비판하시고
혼내시고,
조심하라시고,
경고 하셨는가?
가장 많이 문제 삼으신 것
그들의 가장 대표적으로 혼내신 것이 뭔가?
바로 외식이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하지 않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종교의 모양은 있는데 그 능력이 없는 것이다.
종교 생활은 있는데 말씀에 근거한 삶이 없는 것이다.
여러분 그것을 아는가?
산상보훈 중에
외식,
사람에게 보이려고 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특히 기도, 구제, 금식, 의에 관하여 말하시면서
산상보훈의 거의 반을 이 말씀으로 채우고 있다.
오늘은 그 중에 기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특히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오늘 마태는 산상보훈 중에 주기도문을 넣고 있다.
우리는 이 주기도문을 얼마나 많이 외우고 암송하고
마치 주문처럼 외우고 또 외운다.
그런데 이 주기도문이 나는 무섭다.
주기도문은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 기록되었나?
마태는 산상보훈에 왜 주기도문을 왜 넣고 있는가?
그것은 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다.
그런데 사실은 기도에 관한 이야기 보다 먼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우리의 의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면서
구제와 금식과 보화를 쌓아 두는 것에 관한 이야기 중간에
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넣고 있다.
마태복음 6장, 산상보훈의 중간의 말씀은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경계하라고 하신다.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조심하라는 말이다.
그 연장에서 기도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가장 실수 많이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보이려고 하는 실수.
겉으로는 하는 척 하면서
속은 안 하는 죄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그 배경에서
서두에 말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 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정의하고 그 후에 이 문제들을 풀고 있다.
마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산상보훈의 서두에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정의와 함께
어떻게 저들과 다른지 정의를 내리는 대목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예수님께 그렇게 욕하고 경고하고 조심하라고 하던 사람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으면
천국이 없다고까지 말씀하실 만큼 이 문제는 심각한 문제이다.
외식과 기도의 상관관계
자 보자.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먼저 하신 말씀은
기도할 때 외식 하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래서 보이는 곳,
회당이나
큰 길거리에서 서서 기도 하는 것은 외식이다
저들은 이미 상 다 받았다.
상이 없다 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의 상,
하나님이 진정한 위로를 받는 것은
골방에서 은밀하게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듣고 응답하신다.
그러니
이방인들이 구하는 기도,
말을 많이 하고
이말 저말 다 해야 들으시는 줄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을 본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신다고 말씀하신다.
그 후에 주님이 기도를 가르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주기도문이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아시는데 무엇을 기도하란 말인가?
하나님은 내가 구할 것을 이미 아신다는데
무엇을 기도하라고
주기도문을 가르치신다는 말인가?
오늘은 세부적인 것보다 전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주기도문은 뭐에 대한 기도인가?
분명이 이렇게 시작한다.
<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
사람에게 보이지 말고,
외식 하지 말고
진짜 기도하는 것이 뭔지 한번 가르쳐 줄테니 들어 보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너무 잘못된 기도 속에 이방인처럼,
바리새인처럼 중언부언, 했던 말 또 하고
많은 말을 해야 기도인 줄 아는데
하나님이 원하시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기도의 본질이 뭔지 한번 보라는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내용이 뭔가?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하나님은 스스로 거룩하신 분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누군가를 통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대상을 통하여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
스스로 거룩하시는 분이지만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그것이 기도의 시작이다.
누군가를 통하여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
스스로가 아니라
누군가를 통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는 분!
그분이 바로 하나님 이시다.
하나님은 돌들을 들어 찬양하게 하실수 있는 분이지만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는 분이다.
그분은 누군가를 통하여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는 전제이다.
< 나라가 임하시오며 >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거룩히 여김을 누군가를 통하여 받으시는 것처럼
누군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스스로 임하게도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대상을 통하여
그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기를 기도한다는 말이다.
나라는 단지 바리새인처럼 기도만 한다고 임하는 나라가 아니다.
거룩히 여김을 받으며
나라가 임하는 것 그것을 위해 우리는 기도하고
또 어떤 것을 해야하는 것이다.
그것이 뭔가?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거룩하게 되며 나라가 임하는 이것이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 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 그럼,
여기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가 중요하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졌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어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졌기에 이룬 것 같이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늘에서 이룬 뜻?
하늘에서 이룬 뜻이 무엇인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자 아담부터 생각해보자.
아담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그렇다 구원이다.
죄를 범한 인류를 위하여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진행하신다.
그렇다면
그 구원의 시작이 무엇인가?
범죄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하여
가죽을 옷을 입히고,
수많은 구약의 역사를 통하여
그분의 구원과 용서의 뜻을 베푸시는 것이다.
그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 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인류를 위한 삼위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계획이 이루어 짐을 말한다.
그렇다.
바로 용서이다.
구원의 시작.
용서이다.
구원 안에는 그리스도의 용서와 구원이 있다.
창세기부터 보면
아브라함이 성을 멸하시는 때에 의인이 50인만 있어도 용서하신다는 음성을 듣는다.
출애굽한 백성을 향하여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받고 언약을 받을 때 했던 내용이
용서이다.
[출34:6-7]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은혜의 시작은 용서이다.
구원의 시발점은 용서이다.
사랑의 문은 용서이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은 용서이다.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이루어 질 뜻이 아니라
이미 과거에 이루신 하나님의 뜻은 구원 안에 감추어진 용서이다.
용서가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용서는 결국
사람을 얻는 것이다.
사람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마18:14]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하늘에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잃어버린 그분의 자녀들을 구하기 위해 용서하심 같이
우리도 그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땅에서도 그분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무엇이 이 땅에서 이루어 지는가?
하늘에서 용서하신 것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기를 바란다는 말씀이다.
언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여 지는가?
그렇다.
하늘에서 이룬 뜻인 용서를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룰 때
우리를 통하여 그분은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이다.
용서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
우리가 무엇을 할 때 우리를 그분과 같은 자로 여기겠는가?
우리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해야 그 하나님께서 기뻐 하시겠는가?
그렇다.
용서이다.
오늘 이 주기도는 바로 외식에 관한 기도를 가르치고 있다.
외식의 반대는 용서이다.
용서의 반대는 외식이다.
외식하는 자들에게 기도는 보이기 위해서이다.
외식하는 자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외식하는 자가 가장 어려운 것!
뜻이 하늘에서 이루고 결정한 것.
그것은 용서이다.
외식하는 사람은 용서가 안 된다.
진정으로 기도 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
기도의 진정성은 용서를 통해서 온다.
종의 반대 말은 예배자라 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사람들은 예배자가 되기 위해 출애굽 했다.
우리가 예배하는 자가 될 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 우리는 자유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언제 거룩하여 지는가?
용서할 때이다.
우리가 용서 할 때 이다.
그분을 닮는 최고의 자리는 바로 용서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외식을 지나야 용서가 있고
용서를 지나야 사랑이 있다.
거룩을 잃은 모세, 용서하지 못한 모세
모세를 기억하는가?
모세는 예수님의 모형, 그림자라 했다.
그런 그가 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는가?
지팡이를 두 번 쳐서?
아니다.
수없이 달려드는 백성들을
용서하지 못해서 그렇다.
하나님은 모세를 향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를 말씀하신다.
[신32:51]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연고라
예수님과 모세의 다른 점
예수님과 모세의 다른 점이 뭔가?
그렇다 용서이다.
예수님은 하늘의 뜻을 좇아 오셨다.
그 뜻!
우리를 용서하시는 그 구원의 길을 잘 참고 가셨다.
그러나 모세는 그 거룩,
하나님의 용서의 마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누가 구원의 길을 여시는가?
하늘의 뜻을 따라
이 땅에서도 용서의 길,
십자가의 길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거룩은 우리의 용서를 통해서 온다.
우리가 용서할 때 하나님은 이름이 거룩하여 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
그리스도의 용서의 대가인
십자가를 통해
그분의 이름이 높여지고
그분의 거룩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 언제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여 지는가?
우리에게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가?
그렇다
외식을 넘어 진심 어린 기도를 할 때이다.
그 기도는 용서까지 포함된,
용서의 본질인 나와 모두를 포함할 때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다른 의를 가지게 된다.
<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
이 말씀은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하나님은 8절 말씀을 통해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 했다.
[마6: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리고 6장 31-32절에 보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고 했다.
[마6: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데 여기서는 왜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시키는가?
예수님이 시험 받으실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양식은 뭔가?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는데 필요한 영적 양식이다.
그것은 하늘의 만나를 내일 분량을 챙기지 말라는 것과 같다.
오늘날이라는 말은 바로 지금이다.
오늘이다.
오늘 용서하고
오늘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하여 이 땅에 이루어 지는데 필요한 양식이다.
그것은 영적 양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미 내가 뭐가 필요한지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다시 일용할 양식으로
먹을 것 마실 것을 구하라고 했을리없다.
예수님의 광야 시험 때 말씀처럼
떡으로 만 살 것이 아니다.
먹을 것이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먹을 것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는 자가 아니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영적 양식이다.
용서에 필요한 것은
넓은 마음이 아니다.
오직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말씀이다.
영혼의 양식이 채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용서할 수 없다.
예수님도 마귀를 모두 말씀으로 이기셨다.
말씀이 아니면 우리는 외식하게 된다.
말씀의 뜻,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하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용서에 필요한 영의 양식,
오늘 용서해야 할 사람을 위해서
오늘 필요한 영적 생명의 말씀이 필요하데
그것을 지금 구하라는 기도이다.
참 그리스도인의 증표는 용서이다.
참 용서 받은 자의 진심은 용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말이 뭔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용서의 길을 간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의 용서,
인간들을 용서하는 용서의 길이다.
그리스도의 사명은 십자가이지만,
그 십자가는 용서의 길이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부모이기도 하고,
십자가가 형제자매이기도 하다.
십자가가 교회의 교인이기도 하고 목회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그들이 십자가인가?
용서의 길이기 때문이다.
용서의 길이 아니면 십자가라 말할 수 없다.
용서의 길을 지나야 사랑의 길을 간다.
사랑은 외식을 넘어 용서를 넘어 가야 사랑이 있다.
사랑의 완성이 있다.
그 완성을 십자가를 통해 이루는 것이다.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
용서를 받은 사람만이 용서 할 수 있다.
인류는 하나님께 에덴동산부터 용서를 받았다.
지금도 그분은 우리를 먼저 용서하시고 부르셨다.
먼저 찾아오신 예수님
당시 선생들, 랍비들이 먼저 제자를 찾아가는 법이 없다.
사회 통념적으로 스승들이 제자를 일일이 찾아서 부르는 일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그렇게 부르셨다.
우리는 그분이 부르셔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음을 전제 하기에 지금 우리가 여기 서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래서 베드로에게,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도마에게
자기를 버리고 도망간 수많은 제자들에게
먼저 찾아가서 용서하시고 사랑하는 삶을 사셨다.
현장에서 붙들려온 간음한 여인을 아는가?
그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단호하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것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
성자 예수님,
성령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 뜻을 따라 우리가 우리에게 빚을 진 사람들,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그래야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안다고 여긴다.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로 인정하신다는 말씀이다.
온전하라는 참 의미
산상보훈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 하신다.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런데 이 말씀이 어떻게 나온 말씀인지 아는가?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렇다.
세상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
그것은 세상도 한다는 것이다.
세상과 너희가 다른 것은
용서 할 자를 용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은
바로 용서 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고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꾸인 자,
우리에게 빚진자,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이 성경의 원리
하나님 나라의 원리이다.
[마18:35]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예수님의 말씀 중에 가장 단호한 말씀 중에 하나가 바로 용서이다.
제자가 물었다.
얼마나 용서를 해야 하느냐고?
일흔 번에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다.
그것이 진짜 기도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어려운 것이다.
정말 불가능한 말씀이다.
불가능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 구절이 오는 것이다.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
우리가 언제 시험에 드는가?
먹을 것 때문에?
입는 것 때문에?
아니다.
진짜 시험은
용서할 자를 용서하지 못할 때 시험에 든다.
하나님은 그것을 정확히 아신다.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것!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용서할 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나의 마음이다.
우리가 용서할지 못할 때,
너무 용서하기 힘든 상대를 만나면 시험이 온다는 것이다.
용서하지 못하면 오는 시험.
그것이 우리에게 진짜 하나님 나라에 걸림돌이 되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게 하며
하늘의 뜻이
이 땅에도 이루어 지지 못하게 하는 시험이다.
복음이 뭔가?
복음은 용서 할 수 없는 내가 먼저 용서를 받아보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복음은 용서를 경험하게 한다.
복음은 용서 받은 자가 전하는 것이다.
복음은 날마다 내가 용서 받을 자로 여기며
그분의 거룩을 드러내는 가장 높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온전한 자리이다.
우리가 시험으로 정말 힘들 때,
다만 악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악한 사람으로부터 구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정말 용서하지 못할 상황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길어지면 우리의 영혼은 정말 죽어간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을 체휼하신다.
[히4: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적어도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아신다.
그분은 우리의 감정을 아신다.
우리의 시험 당함을 아신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언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아니어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외식의 삶이 아니라
온전한 용서의 삶을 살 때 그 것이 이 땅에 임하게 된다.
우리에게 빚진 자,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납하고 불쌍히 여기고
죄를 용서할 때
그분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드러난다.
왜 주기도문이 용서와 외식과 관련이 있나?
왜 내가 주기도문을 외식과 용서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나?
앞뒤 문장 구성이 그렇다.
앞에서 외식,
사람에게 보이려고 라는 말로 시작을 했고,
주기도가 끝난 바로 뒤 문장이
바로 용서에 관한 내용이다.
6: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6: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주기도문은 용서의 한 가운데 있다.
주님의 기도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용서할 수 있는 하늘의 양식을 구하셨다.
평생 용서의 삶을 가신 그분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를 품을 수 있는
모든 하늘의 신령한 말씀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었다.
참 신안인과 외식하는 자와의 차이는
오직 용서이다.
그렇다.
그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를 악에서 구해 달라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만나지 않기를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그 용서의 벼랑 끝이
우리가 악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는 곳이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하실 수 있느니라'
용서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그분이 하신 용서하심을 우리가 단지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에 대한 용서의 눈으로
나도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용서이다.
욥의 축복
욥의 축복이 어디서 오는가?
저주하고 욕하고 흠을 잡던 그 친구들!
인생에 가장 어려울 때,
가장 아플 때,
외로울 때,
나를 조롱하고
핍박하고,
욕하던
그 사람들을 향하여
그분의 용서하심을 베푸는 그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의인이라 인정 받게 된다.
그 인정이 우리에게 진정한 축복인 것이다.
아니 그 용서의 자리가 바로
우리 인생의 가장 축복된 자리,
축복의 사람이라는 증거가 될 것이다.
베드로 전서 2장 9절은
우리를 이렇게 정의 한다.
<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
택한 자만이 용서의 울타리 안에 들어온다.
제사장 만이 용서의 화목의 향을 올릴 수 있다.
그리고
용서의 삶,
용납의 삶을 산 사람만이
거룩함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우리는 이 부름 때문에
이 직분 때문에
그분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우리가 가진 용서는 세상을 향하여 내가 줄 수 있는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의 마음이다.
주기도문을 외우지 마라.
주기도문은 외우는 것이 아니라
피 흘려 살아 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