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왜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려고 하는가?
여호수아 22:10-34
사람은 창조되면서
그분과 교제하면서 그분으로 채워져야 하는 어떤 것으로 만족하게 되어있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름으로 행복이라는 것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분량이 내 안에 채워지지 않으면
인간은 불안하고 행복을 찾을 수 없다.
그 채워지지 않은 행복의 근원을
사람은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채우려할 때
어떤 형태이든 우상을 만들어 비어진 그 행복의 근원을 대신하려 한다.
그래서 가짜 행복,
가짜 만족감을 진짜로 여기고 살다
진짜가 와도 그 진짜를 가짜로 여기는 불행이 우리 인생에 있다.
율법과 그리스도가 그렇다.
감정과 성령의 열매가 그렇다.
열심과 본질이 그렇다.
나무와 열매가 그렇다.
우리는 반드시 뭔가로 채워야 한다.
법을 어길 만큼
우리의 형통에 대한 욕망은 강하다.
내 눈에,
내 손에 잡히지 않으면
우리는 늘 하나님을 대신 하는 어떤 것을 만들려 한다.
그분 앞에 있어야 한다.
그분 앞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분명 하나님을 대신하는 어떤 것을 만들려 할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이 눈앞에 보이지 않을 때
그는 하나님을 대신 할 것으로 자신을 삼았다.
만약 자신이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을 하나님으로 삼아 경배 했을지 모른다.
우리에게는 뭔가를 섬기고 경배하는 본성이 있다.
그 본성 앞에 하나님을 보거나 하나님의 어떤 것으로 채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상,
내 마음을 채울 어떤 것으로 안정감을 누리려 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엄청난 기적,
애굽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을 보고도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했던 모세가 눈 앞에 사라지자
바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들의 하나님으로 삼으려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의 마음에 채워야 할 행복의 근원지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채워지지 않자
사람은 그 채워지지 않은 마음에
자신들이 만든 어떤 것으로 채우려는 욕망에 시달린다.
곧 죽을 것이란 것을 들었지만
법보다
내 욕망이 더욱 강하기 때문에 그 욕망을 이길 수 없을 뿐이다.
사람 속에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져야 충만에 이른다.
그 충만이 채워지지 않으면
사람은 끊임없이 채우려는 욕망에 시달린다.
물질로,
명예로,
쾌락으로,
소유로!
십계명에서 시작하는 것
이상하지 않은가?
십계명을 보면 왜 다른 신을 네게 있지 말게하라.
우상을 두지 말라 이것들부터 말하고 있는가?
어디를 봐도 우상, 다른 신을 네게 있지 말라고 하는가?
이런 말들을 그렇게 중요하게
끊임 없이 말하고 있는지?
정말 수도 없이 말하고 있다.
왜 그런가?
이유는 간단하다.
성경의 저자이자,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이 사라진 그자리에
다른 어떤것으로 채우려는 사람의 욕망을 잘 알기 때문이다.
사람은 반드시 뭔가를 섬기고 어떤 것으로 채움을 받아야
완전함으로 나아간다고 본성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알고 사람도 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말하시고
사람은 그것이 뭔지 모르고 욕망을 좇아갈 뿐이다.
그것이 창조 시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음성을 듣고 따름이다.
그것으로 사람은 충만한 상태였다.
온 세상이 충만한 상태였고,
사람도 충만한 상태였다.
그런데 타락으로 그 하나님으로부터의 채움이 어려워지자
땅에서 그것을 찾으려한다.
땅을 보면 땀밖에 없다.
하늘을 봐야 웃음이 온다.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그 열망이
땅에 있는 열망으로 바뀌어 버렸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에 대하여
그 삐뚤어진 열망을 바르게 잡으시는 유일한 방법으로
< 하나님을 사랑함 > 이라고
결론짓는다.
하나님이 아니면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그 공간에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떤 것으로 채우라 하신다.
그것이 온 인류의 오류를 바로 잡으시는
하나님의 정확한 처방이시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에 대한 유일한 치료이자, 회복이기 때문에
우리를 만드셔서 가장 잘 아시는
의원되신 하나님의 처방이자 교정이자
전 우주적 대 수술이
오실 수 없는 분이 오게 하셨고,
죽을 수 없는 분을 죽이신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가장 중요한 모티브는 비교이다
새로운 안경
또 한가지 인간에게 찾아온 문제는 비교이다.
비교가 선악을 판단하는 안경이다.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아브라함과 롯
야곱과 에서
요셉과 형들
그리고 오늘 두 지파 반의 문제까지 모든 문제의 저변에는
이 < 비교 의식 >의 안경이 끼워져 있다.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결정적으로 유혹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3:5)
결국 비교이다.
죄의 숨은 얼굴은 비교이다.
비교가 욕심을 낳는다.
비교가 눈을 멀게 한다.
비교가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게 한다.
왜 사람들이 욕심을 가지는가?
비교하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이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가?
왜 가난한 자는 보이지 않고 나보다 나은 사람만 보이는가?
비교이다.
내 의식의 저변에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이 의식이 바로 선악과의 시작이다.
십자가의 반대말이 뭔가?
영광이다.
결국,
비교이다.
십자가의 반대 말은 죄이지만
그 죄의 저변에는 비교가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 했다.
그 욕심은 바로 비교에서 온다.
비교가 찾아오니 욕심이 생기는 것이다.
인류의 시험- 멸망의 무기
사단이 예수님께 시험한 것이 뭔가?
모두다 비교이다.
첫째 돌이 떡이 되게 하라.
먹을 것이 중요하다 먹어라 라는 유혹으로 보이지만 신분의 비교이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왜 저런 하찮은 인간을 위해 살아야 하나.
먹는 것이 중요하지 하나님의 말씀이 안 중요하다
먹는 것과 말씀의 비교이다.
인간과 하나님의 아들로서 비교한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내려라 천사가 지켜준다 라고 유혹한다.
조건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이다.
인간과 사람의 비교이다.
존재에 대한 비교이다.
그래서 네 신분에 대한 의심이다.
셋째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 만국을 다 준다.
있고 없고의 비교이다.
가진 것과 안 가진 것의 비교이다.
이 비교는 모두
이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 영의 기본 무기이다.
에덴동산부터 악한 자가 써오던 멸망의 무기이다.
만약 우리가 이 비교의식,
비교의 눈을 벗어 나기만 하면
인생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모른다.
몇 일 전 글에서도 말했지만,
우리가 절대가치로서의 의식이 생겨나면 이 비교는 사라진다.
상대가치가 자리 잡은 우리의 의식은 늘 아픔이 오게 된다.
다니엘과 친구들- 비교해 보라
우리가 가장 잘아는 구약의 이야기 중에 다니엘과 그 친구들 이야기가 있다.
포로로 잡혀가서 궁에서 훈련을 받을 때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이 우상의 음식을 먹는 자와 우리와 한번 비교해 보자는 것이다.
[단1:13]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 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 하매
누가 이렇게 당당히 말할 수 있나?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가치를 발견하고 알 때이다.
진정한 비교는 세상과 우리가 해야 한다.
우리의 가장 좋은 가치를 비교하여 보자고
세상과 겨루기 위해서 우리가 가지는 자존심 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꺼꾸로 한다.
세상을 기준으로 자꾸 우리를 비교한다.
그때 문제가 온다.
절재 가치의 존재인 우리를 세상보고 비교해서 따라와라 해야 하는데
세상이 진짜인 것처럼 세상에 우리를 비교하여 보고
실망하고
좌절하고
자꾸 세상을 따라가려니
아픔이 생기고
행복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옆 사람과 비교하고
친구와 비교하고
형제와 비교하고
자꾸 비교하다 보니 행복은 점점 멀어 지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롯의 선택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으로 믿음을 점점 가지게 될 때에
롯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어다.
이때 아브라함은 자신이 좋은 땅을 택하지 않고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준다.
네가 좋은 것을 가지라는 것이다.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 하리라'(창13:9)
왜 아브라함이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나?
이유는 이 사건 앞에 있다.
이 사건 앞에 다른 사건이 있었다.
애굽 왕에게 아내를 누이라 속여 보낸 사건이 나온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애굽 왕이 기겁을 하고 사라를 돌려 보내고
아브라함에게 큰 선물을 주어 돌래 보내는 일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통해 그가 알았다.
아~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내가 세상에 연연해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나님만 잡으면 세상과 비교하지 않고, 무서워 않고 당당히 살아도 되겠구나!
그리고 롯과 문제가 생길 때
당당하게 네가 먼저 선택하라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고 말할 수 있다.
누가 그렇게 말하는가?
하나님으로 채워진 사람이 말할 수 있다.
아니 좀더 정학하게 말하면
세상에서 이론이 아닌 삶에서 그 하나님을 경험 할 때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보통 그것이 약한 사람들 옆에,
그 절대가치를 볼수 있는,
또는 하나님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옆에 두신다.
그래서 내가 안정감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도록 도우신다.
절대 가치를 잡으면 세상과 비교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도 하나님의 채우심
만나주심
경험케 하심을 위해서
기대하고 기도해야 한다.
그 시간을 한번도 지나보지 않으니까
비교의식 앞에 늘 엎어지는 것이다.
해답
우리가 당하는 아픔의 이유가 무엇인가?
때로 당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를 그 비교의식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일,
아브라함이 실수를 통하여
다시금 절대가치,
비교의식에서 해방되며
참 자유를 느끼는 이 마음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이다.
우리에게 언제 에덴이 찾아오는가?
그것은 아담으로부터 그토록 질기게 우리를 잡아 매었던
비교라는 올무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힘으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앎으로
벗어나게 되는 그 때부터
나의 인생에 참 천국의 평화가 찾아 오게 되는 것이다.
기도는 그 비교의 주관적 시각에서
하나님의 신적 시각으로 변화시켜주는 수술시간이다.
예배는 세상의 그 수 많던 비교의 말에서
절대적 가치로 우리의 귀를 정결케 하는 하늘의 의식이다.
공동체는 나보다 나은 사람들이 아니라
나보다 못한 자를 보므로
상대가치에서 절대 가치로 변환된 나의 모습을 증명해 내는
가인과 아벨의 제단이요
세상은 우리의 가치를 증명해 내는 다니엘의 왕의 진미 식탁 앞 이다.
열등과 우월
비교는 우리를 좌절케 하기도 하지만
곧 우월의식을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조금 신앙의 맛을 알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어김 없이 찾아오는 가장 무서운 모습이다.
사실 공동체적으로 비교의식의 가장 무서운 열매는 우월감, 우월의식이다.
공로 의식이다.
시간이 조금만 가면 이 의식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십자가의 걸림돌
십자가를 가장 협박한 것,
가장 어렵게 만든 것이 바로 이 비교의 최고 열매
우월의식이다.
베드로가 참 신앙고백을 하자 칭찬을 하셨다.
그리고 바로 십자가를 진다고 하자
절대로 안 된다고 한다.
조금 업 되면 천국인지 지옥인지도 모르고 설치는 사람들이 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변화되시고 엘리야와 모세와 이야기 하는 것을 보자
또 베드로는 이게 뭔지도 모르고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살자고 한다.
가장 무서운 것이 뭔가?
내가 그 정도 얘기 해도 될 정도로 나에게 공로가 있고
재주가 있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비교이다.
예수님을 넘어지게 했던 십자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고난이나 아픔이 아니다.
그것은 공로와 우월로 채워진 사람들이었다.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있다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먼저 되었다고 예수님의 나라에 한자리씩 차지 하겠다고 싸웠던 제자들!
이것이 십자가의 거치는 것들이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데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데 가장 무섭고 걸리는 것은
우월의식이다.
비교의식에 의해 열등감도 무섭다.
열등감은 혼자만 죽인다.
열등감은 자심감만 채워지면 회복된다.
그런데,
이 우월감은 얼마나 질긴지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한다.
내가 정통이라고 내 세우던 그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을 받는다.
바뀐 사단의 절략
구약에는 우상이 실제 섬기는 어떤 것으로 왔다.
하지만 신약으로부터 지금까지 그 우상은
내 안에 만들고 있다.
사단도 전략을 바꾸었다.
보이는 우상에서 보이지 않는 은밀한 우상으로.
십자가에 넘긴 것은 이 우월의식에 뭉쳐진 사람들의 비교의식에서 시작된다.
교회의 진짜 적은 교회 안에 있을 수 있다.
교회에서 가장 힘든 사람은
이 우월감에 자신의 우상을 세운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에게 답이 한가지 밖에 없다.
우월감의 근원,
우월감의 머리를 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의 우월의 머리를 잘라 버리신다.
그래야 십자가가 보이기 때문이다.
돈이 있는 사람이 교회에서 큰소리 친다.
교회의 개척 핵심이 교회에서 자기 맘대로 한다.
부서에서 기여한 공이 큰 사람이 말을 많이 한다.
봉사 많이, 죽어라 하는 사람이 사람들을 주무르려 한다.
봉사가 공로가 되고 공로가 우월감으로 우상이 된다.
헌금 많이 하고
사역자에게
교회에게
기여한 공의 순서대로 옆자리게 앉으려 한다.
우리는 없을 때
정말 아무것도 모를때 십자가로 구원받고
너무 좋아서 감격해서 섬기고 봉사하고 수고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십자가는 사라지고
나의 공로만 남아
우월한 자로,
우월주의로 나의 눈을 멀어버리게 한것이다.
제자들도 예수님에게 요구했다.
하다못해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까지 나서서 공로의 대가를 달라 했다.
좋은 말 할 때 말석으로 가라.
스스로 상석에 가지 말고 스스로 말석에 가야
사람들과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
아담은 스스로 높아지려 하다 세상으로 떨어졌다.
[눅14:11]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나의 나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가?
그럼 말하지 말라.
그 은혜가 내 맘에 사라질 때부터 나는 스스로 금송아지가 되는 것이다.
실제 이야기 2
목회하시던 장인어른의 교회에 장로 투표를 했다.
한 집사님이 떨어졌다.
그 다음날부터 찾아와서 목사가 이렇니 저렇니 왜 나를 뽑지 않았냐는 등
해서는 안 되는 수많은 이야기를 했다.
내가 왜 장로가 안되냐?
내가 얼마나 수고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했는데 왜 안되냐?
결국 그 일로 장인어른은 돌아가셨다.
디모데에게 보내는 바울의 서신에서
말세에 나타나는 고통의 증상은
자기 우월, 즉 교만이라 했다.
교만은 비교이다.
내가 남보다 낫다는 의식이다.
교회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이다.
어떤 교회에서 여전도사님을 뽑는데
참 좋은 전도사님이어서 담임목사님이 추천을 했단다.
그렇데 보기 좋게 떨어졌다.
장로님들이 절대 안된다고 했단다.
이유는?
그 전도사님이 모태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서울 한복판, 그것도 큰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런 논리로 따지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해야 되나?
나는 또 사역자가 되면 안 되는 건가?
그러면 그 장로님들은 다 모태 신앙인가?
그렇다.
그것이 이유다.
나는 그 사람보다 낫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런 것은 비단 그분들만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그런 것이다.
내 안에 주님 앞에 그런 요구와 당당함이 있는 것이다.
내가 저 사람들과 다르다는 비교의식,
우월의식
공로의식이 자리 잡을 때 십자가는 나와 전쟁을 한다.
사람은 모두 똑 같다.
조금 못하면 열등감에 빠지고
조금 나아지면 의로움을 내세워 우월감에 빠진다.
모두 다 금송아지다.
비교의 열매이다.
진정한 해답
그래서 성경은 해답으로 무슨 말을 하는가?
[빌2:3]아무 일에든지 ~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남을 낫게 여기라 했다.
이 마음이 나에게 아직 오지 않는가?
내 안에 천국이 오지 않을 것이다.
잠시 왔다 아담과 하와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다.
우리는 절대 서야 하는 자리가 있다.
그것은 십자가 앞이다.
십자가 없는 곳에는 비교의 싸움이 끝나지 않는다.
눈 앞에 십자가가 사라지면 우리는 곧장 금송아지를 만든다.
이것이 사람의 본성 욕망이라 했다.
십자가 앞에 설 때에만
우리는 자유 할 수 있다.
[요8:36]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처음 시간으로 우리는 날마다 서야한다.
그것이 죽는 것이다.
내 자아가 날마다 그분 앞에 죽고
그분이 내안에 살지 않으면 나는 날마다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는다.
날마다 십자가를 보지 않고
날마다 십자가 앞에 서보지 않으면
우리는 날마다 스스로 금송아지가 되어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한다.
스스로 금송아지가 되어 십자가를 거치게 한다.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자.
십자가 만이 나를 진정한 자유와
진정한 평안으로 인도할 수 있다.
그분 그리스도 예수는 그 비교의식에서 자유케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나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