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의 길 악인의 길> (시편 1편)
세상에는 오직 두 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입니다.
인생의 수 많은 사연과 눈물과 탄식과 기쁨과 간구가 들어 있는 시편은
오직 두 가지 길로 그 문을 엽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입니다.
그런데 오늘 의인의 길로 대표되는 복 있는 사람을 설명할 때 복 있는 사람의 정의를 먼저 내리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길이 어떤 길인지 먼저 정의를 내립니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데 그 어떤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 악인이 어떤 모습인지 먼저 말하고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이 의인이며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첫째, 악인의 길을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리>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 있는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 반대되는 사람 세 부류를 설명하는데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입니다.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의 공통점은 오직 한가지 입니다.
바로 자리를 위해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죄인은 죄인의 길에 서는 사람이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사람이고
악인은 악인의 꾀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복이 없는 사람,
의인이 아닌 사람은 자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죄인의 길, 오만한 자리에 앉고 꾀를 따르는 길에 있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
의인의 길을 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시편 1편의 결론은 길입니다.
의인의 길이 어떤 길인지 설명하기 위해 먼저 악인의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의 원어는 자리에서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난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인의 길에 빠지는 것은 <어떤 자리>를 추구해서 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악에 빠뜨리는 것은 늘 자리입니다.
높은 자리,
이름 있는 자리,
돈이 벌리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위해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악인의 길에 설 가능성이 많습니다.
세상은 늘 자리로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내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움직이고
내 말 한마디에 세상이 움직이고
내 말 한마디에 온 교회가 성도가 움직이는 자리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유혹입니다.
죄의 시작은 <자리의 유혹>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명분으로 우리는 자리의 유혹을 합리화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추구합니다.
그 자리에 앉아서 더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꿈꿉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에게 <꿈꾸라> 합니다.
그런데 그 꿈이 자리는 아닙니까?
만약 꿈이 자리라면 우리는 악인의 꾀에 빠져 죄인의 길을 걷으며
결국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꿈은 자리가 아닙니다.
오늘 시편은 우리에게 그 꿈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의인의 길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둘째, 의인의 길은 자리가 아니라 <그 분> 입니다.
악인의 길은 오직 자리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의인의 길은 오직 그분으로 사는 삶입니다.
그분의 말씀자체,
<그 분 자체>를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분을 대표적으로 율법으로 표현합니다.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입니다.
그분을 묵상하고 그분과 함께함 자체를 즐거워 하는 인생입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자체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인생입니다.
한마디로 그분 자신만을 바라는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에게는 자리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분을 생각하고 묵상하고 그분과 대화함을 기뻐하는 인생입니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있고 없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께 마음을 드리는 것 자체가 감격인 인생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그분의 말씀이 전부입니다.
인생의 영양분, 인생의 자양분은 오직 그분의 말씀입니다.
내 인생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자리가 아니라
내 인생을 움직이는 힘의 원천은 그냥 <그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은 어떤 자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실 때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유일한 한마디는
<함께> 입니다. <임마누엘>입니다.
의인은 그 <함께함>에 인생을 걸고 사는 사람이고
악인은 함께함보다 <자리>에 인생을 걸고 사는 사람입니다.
셋째, 그래서 자리가 악인과 의인을 규정 짓습니다.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했습니다.
자리를 찾아 움직이는 자는 한 자리에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입니다.
그냥 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변함 없는 마음으로 어떤 자리가 아니라 오직 그분만으로 즐거워하는 인생,
그래서 자신의 가진 것과 누리는 것과 소유하는 것과 얻은 것이
내가 함께하는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기에 다른 어떤 것은 다 거룩한 소비와
영적인 명분을 위해 내어 놓을 수 있는 드림이 있는 인생입니다.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지 못하니 자리를 찾고
하나님 한 분으로 기뻐하지 못하니 가진 것을 내놓지 못하는 인생 즉 악인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자리를 따르는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됩니다.
자리를 따라 감정이 변하고 기분이 변하고 인생의 꿈과 비전이 바뀌는 인생입니다.
함께함을 기뻐하는 의인은 자리와 환경이 아니라 그냥 그 자리,
오직 한 자리,
그냥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분이 주시는 말씀으로 감격하고
그 말씀에 인생의 가지고 누리는 것을 포기하고 내어놓는 인생입니다.
그것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입니다.
여호와가 인정하는 길은 자리가 아니라 어떤 자리든지 그분으로 즐거워 하는 인생입니다.
그분으로 즐거워 하는 인생이란
주신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대로 자신의 삶을 내어 놓는,
그분만이 전부로 여기며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는 인생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습니다.
넷째, 그럼 그 과실의 목적은 <나무>입니까 과실을 먹을 <다른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착각합니다.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는 인생 되기를 누구나 소원합니다.
그러나 그 과실의 목적인 나무 자신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과실의 목적은 나무가 아니라 과실을 먹을 다른 사람입니다.
바람의 나는 겨는 늘 자신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악인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목적은 시절을 쫓아 맺는 과실이 아니라
그 과실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내어줌>입니다.
여호와께 인정하시는 의인의 길은 결국 그분으로 즐거워하는 <내어줌의 인생>입니다.
악인의 길은 자신이 얻은 과실 즉 <자신의 자리>입니다.
의인의 길은 그분의 말씀을 즐거워만 하는 인생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인생입니다.
악인의 길은 그분의 말씀을 자신의 자리를 위해 이용하는 인생입니다.
똑같이 그리스도를 부르고 예수의 이름으로 살지만
어떤 이는 내어주는 인생을 살고
어떤 이는 자리를 차지하는 인생이 목표인 삶이 있습니다.
시냇가의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는 인생을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러나 과실을 맺는 목적이전에 과실을 맺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자리>입니까 아니면 <내어줌>입니까?
악인과 의인의 길은 그 두 가지로 나누어 집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자리를 위해 살지 않고
그분이 함께함을 기뻐하는 인생입니다.
그 함께함의 본질은 결국 내가 얻은 수 많은 과실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주는 인생입니다.
시편의 시작,
인생의 수 많은 눈물과 아픔과 탄식과 간구와 기쁨과 감격이 녹아 있는
그 많은 시편의 시작을 자리와 내어줌으로 시작합니다.
악인과 의인의 길로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악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시작했다 악인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 갈림길은 자리와 내어줌입니다.
과실의 목적은 내어줌이지 자리가 아닙니다.
복 있는 사람!
<자리>가 아니라 <내어줌의 인생> 입니다.
어제보다 더 많이 내어주는 인생,
그것이 복 있는 인생입니다.
* 요하네스버그 한인교회 청년회인 벧엘에서 이라크 교회를 지난 8월에 방문했습니다.
이라크교회는 전기도 물도 없는 어려운 지역입니다.
감사하게 청년들이 방문해서 발전기도 전달해주시고(이동민집사님께서 기증)
한인교회 바자회 기금으로 담요를 구입해서 지역주민 200가정에 전달도 했습니다.
환경이 나아지고 교회가 넉넉해 질수록
아니 형편이 어려워도 우리 삶의 본질,
의인의 길은 내가 맺은 열매를 나누는 인생입니다.
그 본을 보이고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에게 함께함으로 축복을 선물해 주신
이 청년들에게 감사와 박수를 보냅니다.
어려운 아프리카에서 직장을 다니고 공부를 하는 이 청년들의 삶이
자리를 위해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그분의 함께함을 유일한 축복으로 여기며
하나님께서 시절을 쫓아 주신 과실을 저들과 평생 함께 나누는 인생,
내어주는 인생 되기를 다시 기도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적용-
1.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목적이 <자리>입니까 <내어줌> 입니까?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내어주다 결국 자신의 생명도 내어주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서로 이야기해 보기 바랍니다.
2.그렇다면 나는 오늘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내어 줄 것입니까?
가장 작은 것부터 내어주는 훈련을 해야합니다.
내어줌은 연습입니다. 훈련입니다.
내가 맺은 어떤 것 중에 누구에게 무엇을 내어줄지 결정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바랍니다.
몇 일전 김동호목사님의 페북에 일억을 벌면 십의 일을 드리고 일억 오천을 벌면 십에 일점 오를 드리고,
이억을 벌면 십의 이를 드리는 청년 때문에 도전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아닙니다. 백 만원 벌 때 십의 일이 아니라 십의 이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일억을 벌어도 십의 이 삼을 드리는 사람이 됩니다. 작은 것으로도 은혜에 감격해서 드리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가진 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는 인생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3.적용한 후에 달라진 마음과 삶의 변화를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작은 것이라도 나누어야 서로 힘이 되고 능력이 드러납니다.
부끄러우면 메시지라도 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그렇게 많아도 홍수가 되어 먹지 못하는 것은
말씀이 내 삶을 통해 흘러 가야 하는데 내 안에서 멈춰서 썩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만나의 원리>입니다.
만나는 그냥 두면 썩어 버립니다.
그 좋던 만나도 그냥 두면 썩어버립니다.
한 말씀이라도 적용하는 훈련… 하나님의 영광의 시작입니다.
"복있는 인생은 <자리>가 아니라 <내어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