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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그 다음 음성이 들리지 않을때

하나님의 그 다음 음성이 들리지 않을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여호수아11:16-23

 

 

 

 

 

 

 

 

 

해야 것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해야 것을 미룰 ,

 

해야 것을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다음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목자는 양을 향하여 해야 것을 수 없이 외치지만

 

반복하여 듣지 않으면

 

하던 말을 멈추고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어떤 양은 절벽을 향해 가다가

 

목자의 음성을 들어도 멈추지 않으면,

 

하다 하다 멈추지 않으면

 

결국 떨어져 다음 만남이 이루어 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떤 양은 반드시 어떤 것을 해야 목숨을 부지 있는데

 

그것을 하지 않으면

 

목자는 다른 어떤 음성도 말하지 않는다.

 

음성을 따라야만 다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목자는 양을 안다.

 

목자는 양무리의 다음 걸음이 무엇인지 그것을 보고 인도한다.

 

 

 

 

 

아프리카 평원의 누우 떼가 계절이 바뀌면

 

반드시 세렝게티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겨야

 

목초와 물이 보장된다.

 

 

이동은 생명의 보장을 말한다.

 

 

 

그래서 수백만 마리의 누우 떼들이 장정의 이동을 해야 하는데

 

아무리 덩치가 좋은 코끼리라도 이동하지 않으면

 

변화하는 계절 앞에서는 살아 남을 없다.

 

 

 

 

 

 

 

 

우리 인생에 반드시 들어야 하는 음성이 있다.

 

하지만

 

음성을 듣지 않으면

 

다음 음성이 오지 않는다.

 

 

다음 음성은 음성을 들을

 

아니, 내가 들은 것을 준행할 다시 찾아 오게 된다. 

 

 

 

 

 

 

숨바꼭질

 

 

세상에 널리 알려진 놀이 중에 가장 전래가 오래되고 역사가 놀이는

 

바로 숨바꼭질이다.

 

유래는 에덴동산이다.

 

 

하나님과 아담의 숨바꼭질이다.

 

숨바꼭질이 생겨났는가?

 

 

해야 일을 하지 않을 일어나는 일이 숨바꼭질이다.

 

 

 

 

아담의 하나님과 숨바꼭질은 해야 일을 하지 않을 일어나는 증상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신감의 상실이다.

 

그리고 자신감의 상실은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해야 것을 하지 않으면 모습이 자꾸 보인다.

 

 

전에는 보이던 벌거벗음이 보인다.

 

 

전에는 안보이던 비교가 찾아온다.

 

그래서 자꾸 숨고 싶고

 

비교로 오는 두려움과 자신 없음이 찾아 오는 것이다.

 

 

그리고 모습 너머에 있는 두려움을 자꾸만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무언가의 뒤로 자꾸 숨게 되고 다른 어떤 것을 잡으려는,

 

내가 숨을 있는 무언가를 찾으려 끊임 없이 추구한다.

 

하지만

 

추구 끝에는 두려움과 자신 없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고 뿐이다.

 

 

 

 

그래서 처음 증상은 들을 마음에 불편함이 오지만

 

나중에는 음성을 외면해 버린다.

 

 

당당하게 자신이 없는 것이다.

 

해야 것을 해야 우리는 설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가지를 잡고 정말 세상에,

 

힘에,

 

인생에,

 

내가 아는 모든 것에

 

소망이 없음을 깨닫도록 버려 두신다.

 

 

 

 

 

돌아온 탕자

 

 

 

돌아온 탕자를 아는가?

 

 

 

 

이야기가 바로 이야기이다.

 

 

 

설 수 없는 자리,

 

돌아 없는 자리에 오는 것이 너무 힘들다.

 

아버지 앞에 서는 것이 죽을 만큼 용납이 된다.

 

 

아버지가 없어도

 

아버지의 음성을 듣지 않아도 것처럼 살지만,

 

아버지가 없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없어지고 나서야 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이 그리워진다.

 

아니, 아버지의 음성이 그리워 지는 것이다.

 

 

음성은 관계이다.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는 말은 관계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관계는 인격이라 했다.

 

 

 

 

음성은 행동으로 이어 음성으로서의 관계가 이어진다.

 

 

음성이 오면 반드시 그에 따른 행동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인격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향하여 말씀, 음성을 주셨다.

 

'먹지 말라'

 

그러나 음성이 음성으로만 남을 때,

 

음성이 공허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소리에 생명이 실리려면

 

생령이 들어가야 한다.

 

생령은 인격이다.

 

인격은 음성에 삶이 포함되는 것이다.

 

 

 

삶이 없는 소리,

 

따름이 없는 음성은

 

관계의 포기요,

 

인격의 부재요,

 

다음을 보장 받지 못하고 방황하는 길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윗과 사울왕

 

 

 

다윗과 사울왕의 이야기를 보자.

 

 

 

사울왕은 음성을 듣고는 싶었다.

 

너무 듣고 싶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정작 해야 일을 하지 않으면

 

기다리신다.

 

침묵하신다.

 

 

 

 

수많은 기회.

 

아니 내가 충분히 있는 기회를 주셨음에도

 

내가 기회를 잡지 않으면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우리는 침묵이 두려움으로 온다.

 

그래서 어떤 음성이라도 듣고 싶어

 

임시방편,

 

하나님이 음성을 대신하는 어떤 것을 잡으려 한다.

 

 

 

그것이

 

내가 뭔가 몰두해서어질 있는 어떤 ,

 

마음에시적 안정을 주는 어떤 것으로 채우려 하지만

 

결국 다시 찾아오는 침묵 앞에 두려움과 공허함으로

 

하지 말아야 어떤 것을 잡게 된다.

 

사울왕은 결국 접신하는 자를 찾고 영혼까지 팔게 된다.

 

 

 

 

 

 

 

사울왕이 진짜 그렇게 잘못했나?

 

 

나는 잠깐 사울왕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사울 왕이 정말 그렇게 잘못했나?

 

인격적으로 그렇게 사람들에게 잘못을 했나?

 

도덕적으로 그렇게 문란한 삶을 살았나?

 

 

 

 

아니다.

 

 

 

 

그는 시작할 좋게 시작을 했다.

 

 

 

그럼 그렇게 되었나?

 

 

 

 

이유는 하나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을 인정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을 것이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음성을 단지 외면했을 뿐이다.

 

 

 

 

하나님의 마음,

 

성령의 물줄기가 다윗을 향하여 흐른다는 성령의 음성을

 

조용히 외면했을 뿐이다.

 

 

 

 

음성에 대한 외면이 사울을 계속해서 망쳐 놓고 있는 것이다.

 

 

 

 

그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라와 백성과 하나님까지도 인정해서 왕이 되었다.

 

그런 그가 그렇게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마음, 음성에 따르지 않음이다.

 

 

 

다윗을 향한 성령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그는 애써 외면하고 싶었다.

 

 

 

 

그랬더니

 

 

 

두려움이 왔다.

 

 

 

자신의 왕자리 뒤로 숨으려고 했다.

 

아니 누르려고 했다.

 

위치로 누르려 하고

 

권력으로 죽이려 하고

 

힘으로 잡으려 했다.

 

 

 

 

 

사울왕의 문제는

 

다윗과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외면이다.

 

 

 

 

한번 외면하면

 

 

 

 

 

고속도로를 달린다.

 

 

 

 

어떻게?

 

 

 

 

강퍅이다.

 

 

한번 강퍅이 오면 제일 무섭다.

 

 

 

 

 

스데반과 사람들

 

 

 

스데반을 향하여 돌을 던지던 사람들이

 

언제 소리를 지르고 귀를 막고 죽일 아니, 죽이려 달려 들었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할 때이다.

 

 

 

7: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언제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더욱 소리 높여 화를 내는가?

 

 

예수님의 음성,

 

 

그들을 향한 말씀을 들을 때이다.

 

 

 

 

 

 

 

강퍅의 대명사 바로

 

 

 

성경에서 강퍅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쓰는 사람이 누군지 아는가?

 

 

 

애굽 바로이다.

 

 

 

그가 가장 강퍅하다.

 

 

 

물론 성경은 그가 세상의 권세 잡은 악한 영의 대표로서 비유하고 있어도,

 

아무튼 그는 당시의 왕이었고 사람이었다.

 

 

사람이 가장 강퍅할 때는

 

모세를 통해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을 나타난다.

 

 

 

[출7:13]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음성을 듣고 따라갈 기회가 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실 가야 한다.

 

음성을 들어야 계속 들을 있다.

 

이때는 민감해야 한다.

 

그래야 계속 듣고 따르고 다시 들을 있다.

 

 

 

하지만,

 

한번 놓친 음성을 다시 들으려면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리고,

 

배의 땀과 고생과 아픔을 바쳐야 다시 들을 있다.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내가 음성을 다지 잡을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야생의 짐승들,

 

안의 죄의 본성들이

 

나를 강퍅하게 만든다.

 

그것이 더욱 무서운 것이다.

 

 

 

 

나를 향하여 화살을 돌리던 것이

 

이제는 옆에 있는 사람을 잡으려 한다.

 

 

 

 

아담의 화살을 하와를 향하여

 

하와의 화살을 뱀을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돌림과 같다.

 

 

 

 

본성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가 걍퍅한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던 은혜를 포기하면

 

스스로 걍퍅하게 되어져 버린다.

 

 

 

우리는 원래 강퍅하던 사람들이다.

 

우리 사람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좋은 은사를 가지고 있다.

 

 

[히3:8]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음성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오직 강퍅하게 간다.

 

 

 

 

강퍅이 문제가 아니다.

 

 

 

 

 

 

 

 

행복의 정의

 

 

 

우리는 가장 행복할 때가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실 때이다.

 

그리고 음성에 우리가 반응할 때이다.

 

아무것도 없어도

 

그분의 음성을 듣는 만으로도 우리에게는 행복이다.

 

행복은

 

들은 음성을 따름으로 오는

 

인생의 < 자신감 > < 평안함>이다.

 

 

가지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했던 본질이다.

 

 

그것을 나의 표현으로 < 행복 >이라 정의한다.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은

 

물질이 아니다.

 

 

자리가 아니다.

 

 

누림이 아니다.

 

 

 

 

 

 

진정한 행복은

 

 

음성을 들음과 따름에서 오는

 

지속적 관계,

 

그리고 부산물인 < 영적 자신감 > < 평안 > 주는

 

 

참된 < 행복 >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가지 밖에 없다.

 

축복의 ,

 

아니면 저주의 !

 

 

 

 

음성은 오직 길을 선택하게 한다.

 

 

 

 

 

 

 

 

오늘 본문은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11:20)

 

라는 말로 정리하고 있다.

 

 

 

오직 축복의 결과냐 저주의 결과냐이다.

 

 

 

 

 

 

 

 

우리는 살다 보면 길을 잃을 때가 있다.

 

문제는 내가 길을 잃었음을 때도 있지만,

 

길을 잃었는지 모르고 지날 때도 있다는 것이다.

 

 

 

 

 

본인은 열심히 달린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비포장 도로가 나오면

 

나는 사명을 위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고난도 받고

 

어려움을 겪는다 여기며 더욱 신나게 달리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길을 한번 잃으면 고속도로와는 계속 멀어진다.

 

 

 

 

 

원래 길이 그렇다고 여기고 아픔을 삼키고 그렇게 간다.

 

 

 

 

 

조금 더 가다 보면

 

관계가 주는 부드러움과 여유는 사라지고

 

두려움이 찾아온다.

 

 

 

 

 

그리고 마음이 거칠어 진다.

 

 

 

 

 

하나님의 음성을 따르는 길에 거칠어진 마음은 없다.

 

 

 

 

음성 없이 가는 길이 거칠기에

 

길에 적응 하기 위해서

 

마음과 영혼이 거칠어진 뿐이지

 

아무리 핍박과 고난 가운데 가는 자라 할지라도

 

 

 

관계 속에 있는 자는

 

거친 세상을 품는

 

넓은 마음과

 

거칠고 상한 영혼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더욱 커질 뿐이다.

 

 

 

 

 

[눅23:34]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행7:59-60]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아담이 놓친 기회

 

 

 

 

은혜로 시작했다가

 

두려움에 있는 사람들을 본다.

 

 

음성으로 시작했다

 

아담처럼 자신의 나무 뒤에 숨은 사람들을 본다.

 

 

 

하지만,

 

 

부끄러워도 나와야 한다.

 

죽을 같아도 서야 한다.

 

하나님이라는 옷자락만 보아도

 

뛰쳐서 나와야 한다.

 

 

 

 

 

 

 

 

만약 아담이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음성 앞에 나아갔다면

 

그는 이런 엄청난 죄의 결과를 만들지 않았을지 모른다.

 

회개의 기회가 있었을지 모른다.

 

 

 

창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그는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기 전에 음성을 먼저 들었다.

 

 

 

우리가 처음 음성을 놓쳤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먼저 안다.

 

무엇보다 선명하게 하나님의 음성이 손에 만질듯이 들린다.

 

 

그때는 기회가 있을 때이다.

 

 

 

 

혼나도 벌이 와도

 

서야 한다.

 

 

 

 

다윗의 위대함은 그것이다.

 

누구도 하지 못했던 그것!

 

 

 

음성이 하나님 앞에 섰던 것이다.

 

 

 

포기 각오로 섰던 것이다.

 

 

그러나

 

사울왕은 끝까지 음성을 외면했다.

 

 

누구보다도 본인이 안다.

 

 

 

 

역시 아담은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이 때도

 

 

'숨었다'

 

 

 

3:8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회복의 방법

 

 

 

그는 자기가 만든 무화가 나무로 벗은 것을 가렸다.

 

그것으로 잃었던 모든 것을 회복할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들은 음성을 따르지 않으면

 

자기가 만든 어떤 것도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고

 

스스로 자신감을 회복하고

 

두려움을 없애지는 못한다.

 

 

오직 그분의 음성 앞에 서서 음성을 따를 때에만 회복되어 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원래 흙이다.

 

 

의미 없는 존재이다.

 

존재의 의미는 오직 음성이 지속적으로 뿐이다.

 

 

 

 

 

 

오직 우리가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과 따르는 말고는

 

우리 인생이 회복되는 길은 없다.

 

 

 

 

들리던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음성을 따르지 않음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그들이 말하려 했다.

 

바로 왕도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려 했다.

 

 

 

술객과 술사를 통하여 음성을 대신할 다른 어떤 것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음성을 대신할 없다는 것을

 

바로와 백성들을 몰랐다.

 

 

 

 

그래서 바로와 광야의 백성들은 본질이 똑같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아야 한다.

 

 

 

 

히3: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3: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그래서 주님은 음성을 통하여 우리와 관계하고 싶어 하신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음성을 듣고 따를 인격적인 관계가 되는 것이다.

 

 

 

 

 

인격적 관계는 생명이다.

 

 

 

 

 

그것이 우리가 아담이 잃어버렸던

 

그분과 에덴에서 깊이 관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한번 잃어버린 음성은 없는가?

 

 

음성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평생 잃어버리고

 

나를 거칠게 하고

 

나를 슬프게 하고

 

나를 외롭게

 

자신 없게 만드는 이유이다.

 

 

 

 

 

 

 

우리는 원래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사람들이다.

 

자신감이 무엇이었다 생각하는가?

 

 

원래 사람이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직 그분이 말씀하셨던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라' 음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생명의 근원

 

 

생명이 어디서 시작 되는가?

 

그분의 부르심이 시작되는 곳에 시작된다.

 

 

 

노아의 생명이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 방주를 지으라'(6:13)

 

 

그분의 음성이 시작되는 곳이 그에게 생명이 들어가는 시간이다.

 

 

 

 

아브라함의 생명은 그를 부르시는 시간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12:1)

 

 

 

이르시는 시간에 생명이 들어간다.

 

 

 

 

음성은 생명이다.

 

 

 

하나님께서 처음 나를 부르실 들었던 음성!

 

그것이 생명이다.

 

 

 

[요5:2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그것을 놓치면 우리의 생명이 떠나간다.

 

 

 

 

살았으나 것이 아니요

 

들었으나 듣는 것이 아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령을 불어 넣으셨다는 것은

 

그분의 음성이 들리게 했다는 말이다.

 

 

 

 

오직 생령은 사람에게만 주셨다.

 

 

하나님은 동물에게 음성을 주지 않으신다.

 

 

 

음성이 들리는 곳에 생령,

 

생명이 들리는 것이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유일한 이유는

 

음성이다.

 

 

[겔37:4-5]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오직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마른 뼈가 생명이 되는 것이다.

 

 

 

 

 

 

 

 

 

양은 음성을 듣고는

 

생명의 시작이요

 

생명의 교통이요

 

생명의 확실성이요

 

생명의 충만이다.

 

 

교회가 언제 충만하여 지는가?

 

 

그분은 교회의 머리다.

 

언제 교회가 충만하여 지는가?

 

 

[엡1:23]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음성의 교제이다.

 

 

음성을 통한 인격적 교제이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지체가 음성의 관계 속에 깊은

 

인격적 주고 받음이 있을 때에만 충만의 자리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바울을 변하게 것은 빛인가 소리인가?

 

 

 

 

오직 주님은 음성으로만 말씀하신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을 보았기 때문에 변한 것이 아니다.

 

오직 그분의 소리,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변한 것이다.

 

 

 

 

음성은 인격이다.

 

 

 

 

 

 

예수님의 생명의 비밀

 

 

 

예수님은 죽음의 ,

 

고난의 길을 오직

 

음성으로만 확증 하셨다.

 

 

 

 

마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요12:49]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요14:24]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예수님도 역시 음성을 듣고 들은 것을 우리에게 주었다.

 

 

 

 

예수님의 생명의 비밀은

 

 

 

하늘 아버지와 끊임없는

 

 

 

< 음성 > 주고 받음과 < 아버지의 음성을 따름 >이다.

 

 

 

 

 

 

 

 

예수님과 우리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의 원리는

 

 

예수님과 우리 안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목자와 양의 비유가 그렇고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동일하다.

 

 

 

모두 음성으로 연결된다.

 

 

 

 

 

 

 

 

 

지속적으로 음성을 듣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음성이 들리지 않기

 

내가 마지막 들었던 음성을 기억하고,

 

아니면 다시 듣고 따르는 말고는 없다.

 

 

 

가슴이 식어졌는가?

 

마음이 뜨겁지 않은가?

 

 

 

 

나의 봉사가

 

설교가

 

기도가 하늘의 불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이유는 오직 하나다.

 

 

 

 

 

내가 들었던 음성을 외면 했기 때문이다.

 

 

 

 

일이 아니다.

 

 

자리가 아니다.

 

 

어떤 목표를 이룸도 아니다.

 

 

오직 음성을 따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음성을 반복적으로 주신다.

 

 

큐티를 해도

 

설교를 해도

 

사건을 만나도

 

자꾸 마음에 주시는 말씀은 하나다.

 

 

 

자꾸 반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다.

 

 

그것을 잡아야 한다.

 

 

내가 모르지 않다.

 

단지 내가 하지 않을 뿐이다.

 

 

기회가 있는 것이다.

 

 

 

 

 

 

 

반복적 음성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다.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어둠 가운데 있는가?

 

 

아무것도 힘이 없는가?

 

 

그럼 소리를 질러라!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신26:7]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역시 하나님은

 

 

우리의 음성을 들으신다.

 

 

우리의 소리를 아신다.

 

 

 

오직 소리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는

 

 

소리만이

 

 

다시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이 하감하시고 나의 손을 잡아 주시는일한 방법이다.

 

 

 

 

 

 

 

새로운 가라사대

 

 

 

 

 

 

[마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세상의 풍파 때문에, 바람 때문에 잃었다 해도

 

걱정하지 말라.

 

 

 

 

그분은 우리를 알며

 

우리의 음성도 들으신다.

 

 

 

그래서 우리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그분께 소리를 내면

 

그분은 반드시,

 

즉시,

 

그분의 손으로 나를 붙잡으신다.

 

 

그리고

< 가라사대 >라고

 

다시

 

그분의 음성을 들려 주신다.

 

 

 

 

 

 

잃어버린 안의 소리를 회복하라.

 

 

진짜 물에 빠져 숨이 넘어가기 전에^^

 

 

그분께 소리를 내야 한다.

 

 

그리고,

 

 

잃어버린 그분의 음성이 동일하게 찾아 것이다.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

 

 

 

 

 

 

그것이 우리의 생명이다.

 

 

 

 

 

 

 

 

 

 

                           [요10:27]내 양은

                                                         내 음성을 < 들으며 >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 따르느니라 >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