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를 말려라
여호수아11:1-9
꽃이 없으면 열매가 없다.
나비와 벌이 없으면 꽃이 수정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열매는 당연히 없다.
황무한 땅으로 만들고 싶은가?
씨를 말려 버려라.
하나님은 죄가 많아지자 온 땅의 씨를 말려 버렸다.
노아시대 사람들의 생각이 악해지자
씨를 말려 버렸다.
하나님은 씨가 남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죄의 씨가 남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너무 잔인하다고 하신다.
맞다 하나님은 잔인하다.
죄에 대하여 얼마나 잔인한지 모른다.
얼마나 잔인하면 유일한 아들을 죽여서라도 그 죄를 멸하려 하시는가?
아무리 택한 백성이어도 죄를 지으면 삼, 사대를 저주하신다 했다.
타는 불이라 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 했다.
그러나 사람이 아니라 죄다.
죄는 전염성이 있음을 말씀하신다.
누룩이 그렇다.
죄는 늘 누룩으로 비유하셨다.
번지는 것,
번식하는 것, 그것을 조심하라 했다.
죄의 씨가 될만한 모든 것을 다 멸절 시키라고
가나안 정복 시작 전에 말씀하셨다.
오늘 전투에서 다시 그것을 말씀하신다.
죄는 누룩과 같이 씨와 같이 번식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제하라 하신다.
왜 무교병을 먹어야 하는가?
왜 무교병인가?
죄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상징이다.
어떤 죄도 안 된다.
무교병 만들 때 누룩을 온 집에서 없애라고 명령하셨다.
[출12:19]칠 일 동안은 누룩을 너희 집에 있지 않게 하라 무릇 유교물을 먹는 자는
타국인이든지 본국에서 난 자든지 무론하고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쳐지리니
무교병, 무교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의미한다 했다.
죄를 멸하시는 주님의 고난에 결코 누룩, 죄는 허락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나무가 아닌 숲, 숲이 아닌 그림
하나님의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보아야 한다.
에덴의 그 아름다움은 누룩, 한 마리의 뱀, 죄가 들어와서
온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과 민족을 멸망시켰다.
누룩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냐면 온 세상의 사람의 생각을 악하게 하고
그 사람들과 동물들, 호흡이 있는 자는 다 죽일 만큼 무서운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누룩으로 시작된 하늘의 권세 잡은 자,
악한 영을 멸하려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것,
개개인의 삶도 치밀하게 인도하시지만 하나님은 그 죄의 나라와 전쟁 중이신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악한 나라의 머리를 상하게 하였지만
아직은 완전하지 않다.
남은 꼬리들을 우리가 마무리해 주기를 바라신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있는 것이다.
그 죄의 나라의 시작은 바로 누룩, 작은 것 하나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작은 하나의 누룩, 죄도 허락지 않으시고
허용하지 않기를 원하신다.
왜 말도 병거도 없애나?
오늘 말씀은 가나안 북방을 쳐들어가는 장면이다.
하솔와 야빈이 이제 소식을 듣고 온 가나안 거민들을 모아서 싸우러 나왔다.
그들이 모이니 백성이 하도 많아 해변의 수다한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엄청나다고 성경은 말한다.
11:4 그들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나왔으니 백성이 많아
해변의 수많은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으며
그리고 그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나아온 상태이다.
그리고 갑자기 쳐들어가서 습격하고 승리를 거두는데
이상한 것은
말의 뒷발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불태웠다고 한다.
왜 그럴까?
의도가 뭔가?
간단하다.
씨를 말리는 것이다.
결코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죄는 반드시 일어선다.
죄는 반드시 찾아온다.
일어설 가능성이 있는 것,
다시 나의 목을 죄어 오는 것은 다 죽이라는 것이다.
[갈5:9]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죄는 한번 죽인다고 끝이 아니다
죄는 한번 해결 했다고 완전히 죽는 것이 아니다.
내가 숨을 쉬는 동안 끊임없이 나를 찾아온다.
얼마나 무서우면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손과 발과 눈이면 그것을 뽑아내고 잘라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정도다.
[마5:30]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손을 자르고 눈을 뽑아라 왜?
예수님은 아신다.
처음부터 알았다.
아담과 하와부터 철저하게 가슴 아픈 것,
예수님께서 오실 수 밖에 없는 이유!
누룩은 반드시 없애라.
죄의 씨는 완전히 말려라.
그래서
오늘 산상보훈의 말씀 중에 손을 자르고,
눈을 뽑아버리고
어느 것이라도 죄가 들어오게 하는 것은 없애라고 한다.
그분의 죄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 작은 것 하나가
나를 지옥에 던져줄 수 있음을 그분은 알기 때문이다.
'누룩을 없애라'
'눈을 뽑고 팔을 잘라라'
죄를 향한 엄중한 경고인 것이다.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그분의 의지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 누룩 때문에 그분 예수는 십자가에 올라가야 했고
그것을 아셨던 주님은 사역을 시작하는 시점인
산상수훈을 선포하시면서
죄에 대하여 우리가 얼마나 단호해야 하는지 경고하신 것이다.
그 누룩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이다.
누룩은 눈에 보이지도 말게 하라고 하셨다.
< 누룩을 네게 보이지도 말게 하며 >(출13:7)
눈에 띄지 않게, 그리고 다 죽여라
우리가 하나님께 성결하며 거룩함을 추구해야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그것이 너무 어렵다.
이유는 간단하다.
눈에 보이는 누룩이 너무 많다.
죄를 향하게 하는 것이 눈에 너무 많이 뜨인다.
눈만 뜨면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많이 보이는지 모른다.
주님은 그 해결책을 쉽게 제시한다.
'누룩은 네게 보이지도 말게 하며'
< 죄의 씨는 눈에 띄지 말게 하라 > 그것이다.
혹여 사람들을 죽여도 말과 병거를 보면
누구라도 죄의 기회를 만들어
이스라엘을 힘들게 할까 하여 아예 씨를 제하라 하신다.
합리를 좇는 사람은 말도 병거도 다 두면 도움이 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 사람은 아직 죄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아니 죄에 묻혀 살아서 죄가 뭔지, 죄가 아닌 것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깊이 만날수록
죄는 하나님 만큼 나에게 가까이 온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강하게 온다.
그것이 영적 원리이다.
'다 죽이라'
'멸절하라'
이것이 정답이다.
'씨를 말려라'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해답이다.
결국 그들이 살려두었던 히위족속 등 몇 족속이
두고두고 이스라엘의 영적 물을 흐리는 주범이 되어
옆구리에 가시가 되고 그들에게 올무가 된다고 성경은 경고한다.
[수23:13]확실히 알라 ~ 그러는 날에는 그들이 그대들에게 올가미가 될 것이오.
덫이 될 것이오. 그대들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후려치는 채찍이 될 것이오.
그대들의 눈에 가시가 될 것이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대들에게 주신
이 좋은 땅에서 그대들이 완전히 스러질 때까지 이 땅에 남아 있는 그 백성들이 그대들을 괴롭힐 것이오.
그 넓고 좋은 가나안이 남겨둔 몇 족속 때문에
온통 피 바다가되고
눈물 바다가 되고
아픔의 나라가 되어 수 백년을 고통 당하게 된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가져도
작은 누룩 하나 관리 못하면
그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짐 같이
그 사람이 망하고 ,
그 가정이 파괴되고,
그 나라가 멸망하게 되는 유일한 이유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내가 죽이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죽인다.
가능성
내가 죄를 지을 수 있는 씨앗은 모두 말려라.
전부 없애라.
아예 보지 않아야 한다.
잠깐이라도 보면 넘어간다.
나의 편함을 위해 쓰지만 그 편함이 결국 패망으로 가게 된다.
영적 분별력을 흐리게 된다.
영적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비교하게 만들고
마음이 아닌 합리,
믿음이 아닌 가슴을 좇아 가게 만든다.
우리는 보면 따라갈 수 밖에 없는 약함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보는 것은 정말 보기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쾌락을 줄만큼 매력적인 것이 선악과 안에 있다.
나는 잘할 수 있다 여기지 말라.
없애라.
작은 것!
이것은 괜찮겠지 싶은 어떤 것도 없애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모두 같은 것이 적용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나에게 죄가 되지 않는다.
유독 그 사람에게 죄가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을 없애야 한다.
부자청년은 돈이었다.
그는 그 누룩이 자기가 믿던 돈 이었다.
의지 하던 돈!
나에게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는 믿음 그것이 죄의 씨앗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 사람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다.
만약 그가 다른 것이었다면 아마 그것을 말씀하셨을 것이다.
나에게 죄의 씨가 될만한 누룩이 뭐가 있는가?
앎, 높은 학력,
남들이 가지지 않은 재능,
그리고 남들 보기에 좋은 멋진 외모나 멋진 가문 등이 될 수 있고
자녀가 될 수도 있다.
나의 봉사와 경력일 수 있다.
이런 것들은 결국 하나님을 설득하는 자리까지 가게 한다.
아니 하나님, 목사님 그게 그런게 아닙니다.
내가 살아보니까 그렇게 해서는 일이 안됩니다.
그렇게 나온다.
말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됨을 깨고 화평을 깨고
자신의 것만을 고집하고 그것을 놓지 못하는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 여기는 오만과 자만이다.
그 누가 와도
설령 예수님이 와서 이야기 해도 놓지 못하는 그것!
그것이 죄의 씨앗이다.
말이 맞다.
틀린 것이 없다.
그래도 사람들이 나 때문에 힘들어 하면 그곳에는 나로 인한 죄가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이다.
[창4:7]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가 기회를 보고 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히브리어적 사고로 생각해야 한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린다.
앞뒤의 말이 반복되면 생략이 된다.
'죄가 너를 원해서 너를 다스리기 원하고
너는 죄가 다스리기 원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그 말이다.
우리가 선을 위해서 하나됨을 위해서 죄의 씨를 말리지 않으면
죄는 늘 우는 사자처럼 문 앞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나를 다스리려고 한다는 말이다.
죄가 틈타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과 같은 말이다.
[엡4:27]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씨를 말리지 않으면 죄는 틈을 탄다.
기회를 아예 차단하라는 말이다.
우리는 죄가 본성적으로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죄가 힘을 쓸려고 한다.
그런데 힘쓸 판을 만들어 주면 얼마나 설치고 다니겠는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의 공통점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는
연약함을 주셔서 그 죄의 씨앗을 없애 주신다.
가만히 두면 야생마처럼 날뛰고 살 것 같으니까
베드로가 죄를 짓도록 부끄럽도록 민망하도록 얼굴을 들지 못하도록 허락하신다.
물론 자신의 야생적 기질 때문이다.
부끄러움이 있는가?
감사하라.
민망한 일이 있는가?
찬양하라.
얼굴을 들지 못할 일이 생겼는가?
기뻐하라.
그것이 하나님께 내 안에 죄의 씨를 말리는 하나의 방법이다.
아브라함에게 누이를 속임을 허락하셨고,
모세에게 사람을 죽이는 일을 모른체 하셨고,
야곱에게 사람을 속이고 약은 성격을 허락하셨다.
여호수아에게 기도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도록 단 한차례 버려두셨다.
요셉이 형들에게 자랑하게끔 철 없도록 두셨으며
베드로가 천방지축이도록 가만히 두셨다.
바울이 사람을 죽이는 주동자가 되도록 방치 하셨다.
이들이 믿음의 사람으로,
리더로,
이스라엘로,
가나안을 정복하는 사람으로
주를 위해 순교하는 자리에 가며
이방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우기 위해서
그들 속에 있는 죄의 씨!
가장 강력한 그들의 죄의 가능성을 하나님께서 씨를 말리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사도 바울의 자랑
그래서 사도 바울은 늘 자랑한 것이 뭔가?
< 약함이다 >
그래서 그가 깨달은 바는 성령도 그 약함을 도우신다는 고백이 나오는 것이다.
[롬8: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하나님은 사람을 쓰실 때 원칙이 한가지 있다.
아주 중요한 원칙이다.
그것이 뭔가?
약한 자만 쓰신다는 것이다.
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그래서 그는 그의 약함을 늘 자랑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공통점이다.
내가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이 안 쓰신다.
내가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이미 바리새인 서기관이다.
죽을 때까지 그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끝이다.
바울은 자랑에 대하여 특별히 자랑할 것이 있다 했다.
[고전15:31]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죽음이다.
자신의 죽음이다.
그가 정말 이 땅에서 자랑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자아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도 알고 있었다.
빛이 강할수록 어둠이 더욱 강하다는 것을!
그가 은혜 가운데 살수록
죄인일 수 밖에 없는 그의 육체는 더욱 죄의 기회를 틈타 온다는 것을!
사람이 말을 자주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하여 고민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바울의 글 속에는 자랑과 약함,
죄에 대하여 라는 말이 더더욱 많다.
그는 우리가 알기에 사도 중에 사도요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특별한 사역자 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자신 안에 있는 죄로 인하여 고민하며 고통하며 몸부림치는
한 사람의 순례자였다.
그가 택한 유일한 씨를 말리는 방법은
자신이 날마다 죽는 것으로 그 길을 가는 것이었다.
안목의 정욕에 대하여,
이생의 자랑에 대하여,
육신의 정욕에 대하여!
씨를 말려라.
씨를 말리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날마다 죽어야 날마다 산다.
[눅9:23]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래서 바울의 최고의 드림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이다.
내가 드리는 최고의 고백도 같은 고백이길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