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에 붙들린 예수 <예수의 꿈>에 붙들린 나(눅7:18- 50)
내가 목표한 인생의 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꿈입니다.
그런데 되어지는 일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갑니다.
목숨 걸고,
내 평생을 다해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잘 입지도 못했습니다.
겨울 거친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를 먹고, 절벽 바위 사이의 꿀을 따먹고 살았습니다.
숨쉬는 것조차, 생활하는 것 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예비한 한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리던 사람이 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일이 이상한 일만 합니다.
원수를 물리칠 줄 알았는데 원수된 백부장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하찮은 원수의 종을 기적과 능력을 동원해 고쳐주고 있습니다.
나라를 바꾸고 시대를 바꿀줄 알고 나를 희생하고
내 인생을 바쳤는데 그가 겨우 하는 일은
원수의 종이나 고치고,
과부나 돌아보고
죄인들과 함께 먹는 일만합니다.
더욱이 나는 감옥에 갇혔는데 말입니다.
의심이 생깁니다.
실족하게 생겼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의 실수는 그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면서 내가 그 꿈을 정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정한 비전을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세례요한은 지금 제자들을 보내
'기다리던 사람이 당신입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의심하고 실족하게 생겼습니다.
왜요?
내가 <바라던 대로> 되지 않아서입니다.
신앙의 시작,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은
내가 기대하고 내가 바라는 꿈과 비전을 버리는 것입니다.
여인이 낳은 자중에 가장 큰 자였던 세례요한의 실수는
자신의 꿈과 비전에 예수님이 따라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의 실수 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내가 기대하고 내가 바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 꿈과 비전을 내려놓지 않으면 우리는 또 의심하고 실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28)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가 왜 하나님 나라에서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큽니까?
자기의 꿈을 이루고자 달려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자기의 비전,
자기의 꿈을 향해 인생을 던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자기의 꿈과 비전을 이루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큰 교회를 이루고
그래서 선교지에서 수 많은 열매를 맺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합니다.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가 될지 모르지만
자신의 꿈과 비전을 내려놓고 가지 않으면 결국
의심하고 실족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가 됩니다.
내 꿈을 이루는 사람이 아니어야합니다.
내 비전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면 안됩니다.
세례요한의 위대함은 자신의 전부를 걸고 예수님을 <준비>했지만
세례요한의 가장 큰 실수는 자신의 꿈을 위해 예수님을 <준비> 했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시작은 나의 무능입니다.
내 꿈도, 내 비전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적 죄인입니다.
은혜의 시작은 죄인으로서의 인식입니다.
철저한 죄의 사죄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 이야기 후에 나오는 것은
향유를 부은 여인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얼마나 죄를 탕감 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죄를 깊이 깨닫는 것 만큼 내 꿈을 버리고
내 비전을 버립니다.
죄를 많이 사함을 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꿈을 키워야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인식을 키워야합니다.
그리고 죄의 사죄를 더 깊이 체험해야합니다.
그래서 내 꿈에 예수님을 이용하고
내 비전에 예수님을 맞추는 인생이 아니라
철저한 죄의 인식으로 사랑을 더 많이 하는
예수님이 원하는 꿈을 위해 내 인생을 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 꿈>에 붙들인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꿈>에 <내>가 붙들려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깊은 영성과 깊은 수도사적인 삶을 살아서
하나님을 위해 사는 헌신의 깊이도 놀랍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영성,
더 깊은 신앙,
더 깊은 학문과 지식이
예수님을 나의 꿈으로 이끌어 오게도 합니다.
세례요한의 이야기를 향유를 부은 더 많이 사함 받은 여인의 이야기로 결론을 맺습니다.
더 많이 사함을 받은 인생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너무 많은 사함 때문에
내 꿈,
내 비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그저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내 모든 재산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은
사함 받고 사랑하는 인생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인생들은 다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 끝은 내 꿈을 이루고 내 비전을 이루는 것 밖에 되지 못합니다.
그분의 꿈에 내 인생을 던지십시오.
그분의 비전에 내 생명을 거십시오.
겨우 드린 몇 시간의 예배
겨우 드린 몇 푼의 헌금에 그분을 꿈이다 비전이다 하며 이용하지 마십시오.
그분을 위해 내 전부를 드려도 아깝지 않을
<사죄의 은혜>가 내 삶에 넘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 내 꿈에 붙들린 예수가 있고
예수의 꿈에 붙들린 내가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에게 붙들려 있습니까?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의 실수는 내 꿈에 예수님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꿈에 붙들인 인생은
죄를 알고 죄의 사죄를 알고 죄의 전적 타락을 알아서
내 꿈도 비전도 내려놓고 달려가는 인생입니다.
요셉의 위대함은 그가 가진 꿈에 인생을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꿈을 형들의 배반속에서도
종으로서의 삶에서도
누명을 받고
감옥에 살면서 그가 그 꿈을 살아낸 것입니다.
모세의 위대함은 그가 위대한 리더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
이스라엘을 예배하는 백성 삼겠다는 그분의 꿈을
삶으로 살아 낸 것입니다.
내가 꾸는 꿈은 나를 여인이 낳은 자중에 가장 큰 자로 만들수는 있지만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로 만들지만
하나님이 꾸는 꿈을 위해 나의 전부를 드리면
이 땅에서 가장 작은 자로 살지라도
천국에서 가장 위대한 인생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 꿈, 아닙니다.
하나님의 꿈에 내 인생을 던져야합니다.
누가요?
더 많이 탕감 받은 인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