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이유(눅7:11- 17)
내가 잘 하면 사랑을 받고
내가 못하면 버림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열심과 행위의 조건으로 나를 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죽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도 죽었습니다.
어찌 보면 남편도 아들도 잃은 여자의 입장에서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아픔을 당하는지 인생이 원망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욕합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 합니다.
남아 있는 생명의 여인을 향해…
남편도 죽이고 아들도 죽인 여인이라고 말입니다.
고쳐달란 소리도 안했습니다.
살려달란 말도 안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인성으로 오셨습니다.
마치 남편도 죽고 남은 아들도 마지막으로 보내는 과부의 길을 막기 위해서
온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 행려를 막으십니다.
그리고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누구도 살려달라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냥,
그냥 입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불쌍히 여기사> 라고 하십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13)
우리에게 이유가 있어야 복을 받고
우리가 뭔가 복 받을 이유가 있어야 축복을 받는다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우리에게 이유가 있어서
우리가 뭔가 열심을 내어서 복을 받고 사랑을 받고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는 이유는
<눈물>입니다.
우리의 눈물이 하나님의 <은혜의 그릇>입니다.
그 눈물로 만든 그릇에 하나님의 은혜가 쌓이는 것입니다.
남편을 먼저 보낸 과부가
남은 아들을 잃자 남는 것은 오직 <눈물>입니다.
오직 <인생의 외로움>입니다.
남은 과부의 그 눈물의 그릇에 예수님의 <심장>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눈물의 그릇입니다.
아무것도 구하지도 바라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생명을 다시 얻었습니다.
어찌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거저 주십니다.
구하지 않아도 너무 소중한 것을 알기에
잃으면 너무 가슴 아픈 것을 알기에
구하지 않아도 거저 주십니다.
거저 받는 것이 더 큰 은혜입니다.
공짜는 가치 없다 생각하지만
공짜가 더 가치 있는 것입니다.
거저 받은 공짜들,
오늘 과부는 아들의 생명을 구하지 않아도
그녀의 눈물의 그릇이 은혜를 담았습니다.
공짜로 얻은 것들을 우리는 너무 소홀히 합니다.
너무 소중한데 없으면 죽을 것 같은 것들입니다.
늘 같이 있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늘 숨을 쉬고,
먹고 마시고 말을 하고 노래를 하고
샤워를 하고
함께 이야기를 하는 것들입니다.
너무 평범하고 공짜 같이 가치 없는 것들이
더 소중한 것들입니다.
오늘 과부는 그녀의 열심과 수고와 노력이 아니라
그냥 그녀의 눈물이 그녀의 가장 평범한 보물을 다시 찾았습니다.
눈물의 그릇 속에 평범한 공짜의 은혜가 다시 담겼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 그렇게 말합니다.
"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16)
하나님이 우리를 돌아 보신 것은
무슨 큰 것들이 아닙니다.
그냥 가장 평범한 삶의 일상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돌아보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일상을,
공짜로 얻은 것들의 가치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평범함을 사랑하십니다.
죄는 <평범함>을 거부하는 본성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평범한 날에 부르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내가 뭔가 해서 뭔가를 얻었다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뭔가 해서 특별한 어떤 것을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그저 평범한 일상과 공짜로 얻은 것들의 소중함을 아십시오.
주님은 내가 뭔가 해서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평범함을 잃어버린 우리의 일상의 눈물에
주님의 가슴이 움직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깊고
목사로 선교사로 경험이 많아지면서 평범함을 잃은 자들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잃어버립니다.
많은 경험이 평범함을 잃은 그들의 눈물의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성숙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평범함을 잃은 그들의 아픔 앞에 서서
눈물의 근원인 관에 손을 손을 대는 <가슴>입니다.
선교사로 일을 하며 평범함을 잃은 흑인들의 아픔이
다 그렇게 살지 않느냐는 무딘 가슴이 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목사로 살면서
너무 많은 아픔의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그저 그렇게 다 그렇게 눈물이고 아픔이라는 대수롭지 않은
하나의 케이스로 여기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수 많은 아픔과 눈물로 얼룩진 인생을 보면
주님은 이 마음을 잃지 않습니다.
평범함을 잃은 그들의 눈물을 향한 <불쌍히 여김> 말입니다.
일을 잘 할 수록
눈물을 무시합니다.
눈물 흘리는 남편과 아들을 잃은 눈물의 그릇보다
얼마나 장례를 잘 치러 냈는지 일에 관심이 갑니다.
그것이 신앙의 연륜이 깊어갈수록
우리가 무엇에 마음을 끝까지 지켜야 할지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들의 탁월함과 수준 높은 신앙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종으로 살던 그들에게 찾아오신 이유는
그들의 눈물입니다.
그들의 고통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 내려오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의 탁월함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과 눈물입니다.
예수님이 일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열심과 열정과 탁월함이 아니라
우리의 눈물과 고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이 음식이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이 호흡이 되십니다.
신앙의 성숙은
그분의 음식이 나의 음식으로 삼고
그분의 호흡이 나의 호흡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그분과 같이 <숨>을 쉬고
<호흡>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
능력을 가진 다는 것이 아닙니다.
더 높아지고 더 나아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성령과 깊이 호흡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숨과 호흡에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을 내 가슴을 더 깊이 느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오래 믿고
신앙이 좀 깊어지셨습니까?
혹시 일에 더 노련하고
일에 더 숙달되고
일만 잘하는 일 쟁이는 아닙니까?
주님과 깊이 호흡하지 못하는
능력과 일과 수고는 결국 거짓 선지자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더 많이 충성하고
더 많이 땀 흘리고
더 많이 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눈물의 그릇에 담긴 것이
은혜 임을 알지 못하는 인생!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오늘 그분의 마음을 표현하십니다.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 임이요"
우십시오.
더 우십시오.
주님이 웃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일하는 토양!
우리의 눈물입니다.
열심보다 눈물이 주님의 가슴을 움직이는
은혜의 이유입니다.
* 드롱콥교회 유아세례식이 있었습니다.
총 8명의 아이들이 유아 세례를 받았습니다.
가정이 깨어지고
아버지가 없고
친부모가 아닌 가정이 이 땅 아프리카에는 너무 많습니다.
부모와 함께 그저 평범하게 유아세례를 받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알지 못합니다.
깨어진 가정덕에 유아세례가 만이 늦어진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시간의 이유는
그들이 평범한 일상의 축복을 알기 때문입니다.
잃었던 것을 다시 찾는 기쁨이 하늘의 천사도 기뻐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평범한 일상을 살면 기뻐하고 찬양하는 사람은
성부 하나님께서 더더욱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
태초의 평범한 날의 일상을 돌려 주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