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의 광장 (눅7:1-10)
말하는 것이 나가 아닙니다. 글과 설교가 내가 아닙니다.
나는 발을 땅에 붙이고 살며 원수 속에서, 나를 미워하는 사람속에서
<관계의 한계>를 넘는 것이 나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나온 사람들이
온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몰려 왔습니다.
놀라운 설교를 하셨습니다.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을 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복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복은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를 더 잘 대해주고
뺨을 치면 다른 쪽도 대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도 주라 하십니다.
그렇게 <말> 하셨습니다.
그렇게 <설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처음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자신들을 억압하고 압제하고
통치하고 있는 <원수>
<로마 백부장>입니다.
그것도 직접 오지 않고 인맥을 동원해서 청을 하려합니다.
유대인의 장로가 한 사람도 아니고 몇 사람이나 이 문제로 찾아왔습니다.
자신이 말하고
자신이 설교하고
자신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 그 내용 그대로
자신이 현실 앞에 찾아온 것입니다.
원수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하찮은 <종>의 문제로 말입니다.
고쳐주어야합니까 말아야합니까?
원수입니다.
자신의 민족의 원수이고
핍박하고 압제하고 통치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십니다.
<친히> 가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함께 먹지 않습니다.
함께 말도 썩지 않습니다.
거부하고 배척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이 로마 군인들이 자신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가십니다.
그들의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십니다.
병을 고치러 가십니다.
아닙니다.
병을 고치러 가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용서하러 가신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주기도문의 핵심은 용서라고 이미 말씀을 오래 전에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종을 고치러 백부장의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셨기 때문에 그 집에 가시는 것입니다.
중심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병을 고치지 못합니다.
함께 식사도 하지 않는 그 집에 병을 고치러 가지 않습니다.
산상수훈 후에 첫 만남의 사람은 이방인 백부장입니다.
원수이고
유대인을 억압하고 미워하고 통치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십니다.
용서하러 가십니다.
자신이 말한 <말>,
자신이 전한 <설교>,
자신이 말하던 것을 살아내기 위해 가장 힘든
원수의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십니다.
백부장의 집으로 말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힘든 것은
내가 전한 말,
내가 평소에 하던 그 설교를 내가 살아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결론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음 같이
<살아 내라> 는 것입니다.
말로 조지지 말고 말씀이 육신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말을 잘 하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는
<관계의 한계>를 넘는 <원수>의
<삶의 현장>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피가 마르고
악이 받치고
가슴에 응어리가 목까지 차오르는 감정의 격함의 현장인
관계의 한계를 넘는 삶의 현장에 서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말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원수의 관계를 넘는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십니다.
왜 예수님이 광야 40일을 지날 수 있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그 힘으로 예수님은 광야 40일을 지나고
마귀의 시험도 받고
그리고 오늘 원수의 관계의 현장으로 들어가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들은 음성,
하나님께 받은 비전,
하나님이 주신 꿈을 잘도 말하면서
원수의 삶의 현장에 가기는 싫어합니다.
그들에게 내가 가진 능력,
내가 가진 물질,
내가 가진 좋은 것을 주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과 소명과 기적만 붙들고
주여 주여 하지 말고
관계의 한계를 넘어
원수의 요청에 내가 가진 재능과 물질과 능력을
섬김이라는 축복의 통로로 사용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수천 년을 기다린 하늘의 말씀을 전하고
왜 바로 원수가 찾아 왔을까요?
왜 원수의 삶의 현장으로 가야만 하는 현장을 만들어 보여주셨을까요?
내가 받은 말씀,
내가 들은 하늘의 음성,
내가 가진 꿈과 비전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을
내 삶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여 역사하는 현장에 서 보라는 것입니다.
평생 예수를 믿지만
비전만 말하고,
평생 예배를 드리지만
내 꿈을 이루기에 급급하고,
평생 기도하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는 현장으로 가지 못하는
관계의 한계에 갇힌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화려한 말 재주가 아니어야 합니다.
수려한 설교가 아닙니다.
기가 막힌 논리와 남들 보지 못하는 탁월한 관점이 아닙니다.
나에게 임한 말씀이
관계의 한계를 너머
나를 미워하고
나를 아프게 하고
나를 조롱하고
나에게 원수처럼 대하던 그 사람에게
내가 가진 것으로 나누어 주고 섬기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6:32)
하나님의 아들을 증명시키기 위해 주님은 우리를
관계의 한계로 몰아넣으십니다.
예수님 스스로 그렇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말로 조지려 합니다.
말로 다 하려 합니다.
주님이 주신 지혜와 탁월한 논리와 말과 글 재주로
관계의 한계에 갇혀서 스스로 옳다 여기는
<자칭 의인>으로 살려합니다.
소경이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말로만 글로만
설교와 이론과 논리로만 자칭 의인으로 살고
결코 원수의 삶의 현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역사하려는 길을 거부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국은 진리만 말하다 삶을 잃었습니다.
복음만 말하다 예의도 잃었습니다.
예의가 없으면 의리라도 있고 의리가 없으면 상식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복음 때문에
진리 때문에
상식도 없고 예의도 없고 의리도 없는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복음은 있는데 말만 남고
진리는 아는데 말씀의 역사는 없는 기독교!
우리의 현실입니다.
백부장의 집으로 가야 합니다.
원수도 복음이 필요하고
원수도 주의 긍휼이 필요하고
원수도 사랑이 필요합니다.
왜 그들이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합니까?
사랑 받고 싶어서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미워하면 할 수록
외치면 외칠 수록 나를 사랑해 달라는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자존감이 약해서
그 자존감을 말로 채우려 합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사람들의 공감을 받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야 나을 수 있는 <병>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러 가신 것이 아니라
<사랑>을 채우러 가신 것입니다.
용서의 다른 말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다른 말은 용서입니다.
원수도 사랑이 필요하고
나를 미워하고 욕하는 사람도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 받기 위해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보다 내가 낫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고
나를 증명하고 나를 자랑하기 위해 말이 자꾸 많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과 설교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원수의 <삶의 현장>으로 가십니다.
평생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마귀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
우리에게 원수를 허락하십니다.
욥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욥처럼 하나님께 할 말을 드리지 못합니다.
욥의 의인으로서의 증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신을 욕하고 저주하고 말로 조지던 친구들을 위해
화목제를 드리고 용서한 삶입니다.
말로 인생을 살던 친구와
그 말을 원수의 삶의 현장에서
용서의 삶으로 자신의 의인됨을 증명합니다.
그것이 욥의 재산이 두 배가 되는 결정적 이유가 됩니다.
마귀에게 하나님이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축복도 하나님은 마귀에게 할말이 있어야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평생에 이 한번의 증명의 시간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햐야는
원수의 삶의 현장을 만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꿈이 아닙니다.
비전이 아닙니다.
요셉은 자신이 꿈을 꾸고 싶어서 꾼 꿈이 아닙니다.
그냥 꿈이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용서하지 못하는 원수된 형들을 용서하는,
그들의 삶의 현장에 당당히 용서의 이름으로 서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자리,
내가 가진 힘,
내가 가진 물질을 그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꿈을 찾아 평생 헤매지 마십시오.
비전을 찾아 평생 기도만 하지 마십시오.
다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됨의 자리인
원수의 삶의 현장에서
내가 가진 것으로 그들을 섬기십시오.
오늘 관계의 한계를 넘어
그들의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처럼
나도 그렇게 그 현장으로 들어가는 용기와 결단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해 보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의 말씀 중에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신 다'는 것은
내 꿈과 비전을 이룰 때가 아니라
그 원수를 위해 내가 <먼저> 식탁을 차릴 때
주께서 내게도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미워하고 원수가 잘 되지 않음이 주께서 나를 축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의 삶의 현장에 들어가서
내가 가진 것으로 그들에게 상을 차려주는 <나>,
그 자체를 만드시는 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주님의 사명입니다.
주님의 꿈입니다 .
주님의 비전입니다.
그래서 주님에게 꿈과 비전은
원수를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위해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상을 차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심판이전의 주님의 꿈과 비전입니다.
주께서 마귀에게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라고 하심 같이
주께서 마귀에서 나를 향하여
'내 종 00를 유의하여 보았느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언제요?
<관계의 한계>를 넘어 각자에게 있는
<백부장>의 삶의 현장으로 걸어가는
<믿음의 발걸음>이 내 삶에 있을 때 말입니다.
* 발방크 교회의 예배를 드리는 뒷모습입니다.
꼭 우리의 삶의 모습입니다.
예배 속에서 숨으려 하고,
내 꿈과 비전 속에 숨으려 합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얼마나 많은 비전을 이루고
얼마나 많은 능력과 기적을 보여 준 것으로 주님은 우리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 능력과 기적이 도리어 자신들을 망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 능력과 기적과 비전과 꿈속에 숨지 마십시오.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 됨이 결국 마지막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됨!
삶의 현장에서입니다.
원수된 백부장의 삶의 현장에서
내가 가진 것으로 나누고 섬기고 베푸는
관계의 한계를 넘는 나의 삶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꿈을 좇다 자기를 잃었습니다.
비전을 좇고
화려한 인생을 꿈꾸다 전부를 잃었습니다.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곳은
원수가 없는 예배당 한쪽 구석이 아니라
원수의 삶의 현장에서 내가 걸어가는 발걸음으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을 원수의 말의 장터에 내 놓음 같이
우리를 그렇게 내 놓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됨과
하나님의 축복의 기회입니다.
화목제입니다.
그들을 위해 예배하고
용서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자랑의 근거가 되는 내 삶의 현장!
축복의 광장입니다.
(사진:서은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