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 잘 하세요" (눅6:39-49)
목사의 좋은 말에 속지 마십시오.
화려한 글과 거침없는 설교에 속지 마십시오.
사람이 듣기에 좋은 말과 남들과 다른 말과 글에 인생을 맡기지 마십시오.
나의 글과 나의 말에 나를 판단하지 마십시오.
말이 내가 아닙니다.
글이 나 일수 없습니다.
말을 한다고 글을 쓴다고 내가 변하는 것은 아니고
내가 그렇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어찌보면 말로 다른 사람을 더 비판하고
어찌보면 글로 다른 사람의 약점을 더 잘 파헤칠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과 같은 말씀으로 복과 화를 말씀하시고
비유로 결론을 지으십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형제의 눈 속의 티를 보고 내 눈 속의 들보를 보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비판 잘 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으로 착각합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약점을 찾아내고
잘 따지고 잘 비판해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내고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깊은 뜻들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이나 글이 그 사람이라고 착각합니다.
오늘 주님은 그런 사람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정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나 자신의 모습은 오직
<용서>하는 삶을 말합니다.
줄 수 없는 자격의 사람에게
<주는 삶>을 말씀합니다.
저 사람의 약점과 허물과 남들이 보지 못하는 탁월한 시각으로
다른 사람을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비판과 허물과 탁월한 시각의 칼을
자신에게 대라고 하십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42)
자신에게 대지 못하는 칼 날을
다른 사람에게 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먼저 비판하고
자신을 먼저 공개하고
자신을 먼저 파헤쳐야합니다.
자신의 것이 다 파헤쳐지고 그리고 그 반성으로
다른 사람을 향하여 도움의 손길을 줘야합니다.
우리는 자꾸 실수합니다.
내가 보는 관점,
내가 가진 탁월한 시각과 의식을 자꾸 다른 사람을 향한
비판과 분석과 헤아림으로 사용합니다.
자신을 향해야합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한번의 칼날에 자신을 향한 열번의 칼날을 대야합니다.
그것이 나를 증명하는 비결입니다.
이어 말씀합니다.
좋은 나무와 악한 나무의 결론은
용서하고 더 주는 삶,
즉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삶을
<내가> 살아내는 삶을 말합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46)
비판이 없어서 시대가 어두운 것이 아닙니다.
헤아리지 못해서 교회가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적하고 말하지 않아서 변화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한 대로
내가 아는 대로
그 진리를 <나에게> 적용하지 않아서입니다.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입니다.
반석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을 잘 하는 재주도 아닙니다.
글을 잘 쓰는 능력도 아닙니다.
반석은 내가 아는 것을 나에게 먼저 적용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비판 받을 자에게 향한 그 비판을 나에게 적용하고
남들을 헤아리는 그 헤아림을 나에게 먼저 적용하는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빼는 아픔을 지나는 것입니다.
나의 약함과 허물과 실수를
다른 사람에게 고백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약함과 연약함을 수 없이 쏟아놓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좋은 나무와 악한 나무가 보기에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똑 같은 나무인데
비판과 헤아림을 나에게 <적용하지 않는 나무>입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 악한 나무가 되는 것은
그 좋은 글과 말하는 재주를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하는 능력입니다.
<능력>이 <악한 나무>를 만듭니다.
<자기>에게 <적용하지 않는>
<말>과
<글>과
<설교>가
<악한 나무>를 만드는 것입니다.
<악한 나무>는 악한 일을 하는 나무가 아닙니다.
그 좋은 글과 말과 설교의 능력를
나에게 적용하지 않는 나무를 말합니다.
듣고 행하지 않음이 집이 파괴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49)
우리는 자꾸 듣고 말하려 합니다.
듣고 글의 화려함으로 자신을 표현하려 합니다.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의 약점은
악한 나무가 될 <가능성>이 누구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글과 말과 설교로 다른 사람을 헤아리고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한 그대로
주님이 나를 헤아릴 것입니다.
그것이 <심판의 기준>입니다.
"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38)
주님의 말씀을 결론적으로 한마디의 음성으로 나에게 들립니다.
"너나 잘 하세요"
글을 쓰고 말을 하고 설교를 하는 나이기에
오늘 이 말씀이 두렵고 떨림으로 들립니다.
* 말을 해야 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글을 쓰고 마음을 나누어야 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설교를 하고 사람들 앞에 늘 서야 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들을 향한 말과 글과 설교가
살았던 삶을 이야기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늘 조심하고 조심하고 조심하고 조심해야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내가 살았던 삶이 또 <나의 의>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자리입니다.
사람 앞에 선다는 것,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설교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해야하기에
악한 나무가 아니라 좋은 나무가 되기 위해
다른 사람을 향한 글과 말과 설교가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해 먼저 적용 되는 것이기를 노력해 봅니다.
홍수 때 정작 필요한 것은 물입니다.
넘쳐나는 말과 글과 설교에 정작 필요한 것은
<삶>입니다.
말씀을 삶으로 목숨 걸고 살아내는 한 사람!
그 한 사람을 통해 주님은 온 세상의 마실 물을 흐르게 하실 것입니다.
그 <한 사람>.
당신이 아닌
내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설교의 완성,
말의 완성은...
<십자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