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은 있는데 <생명>은 없고 신앙은 있는데 <사람>은 없다 (눅6:1-16)
율법을 가지고 논하는 사람들의 중심은
늘 자기가 의롭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키고, 나는 틀리지 않고 나는 맞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키는 안식일,
내가 지키는 법,
내가 잘 하는 것이 은혜의 방편이 아니라
정죄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기도가 은혜의 방편이 아니라 정죄의 도구가 되고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는 사람은 새벽기도가 신앙의 척도가 되고
십일조를 잘 하는 사람은 십일조가 축복의 근거가 되고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사람은 늘 주일이 은혜의 통로가 아니라
정죄의 도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보다 잘하는 사람,
나보다 잘 지키는 사람이 삶의 표준이 되고 모범이 되지만
나보다 못하고
나보다 덜 거룩하고
나보다 신앙이 좋지 않은 사람은 늘 판단과 정죄의 대상이 됩니다.
죄인을 원하시고
죄인들과 함께 하시고
죄인들,
이미 율법에서 제외된 사람들,
사람들이 거룩하지 않다고 결판이 나버린 사람들과 함께 하겠다고 하신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율법에서 제외된 사람과 사람들이 포기한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가장 중요하게 여긴 안식일에 관한 문제를 풀어가십니다.
첫째 문제는 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는 것입니다.(5장을 중심으로)
왜 당신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결정적 비유는 포도주 가죽부대 이야기입니다.
나는 옛것이 좋다,
나는 묵은 것 낡은 것이 좋다고 결론을 내시면서
나는 죄인들과 함께 하겠다고 스스로 선언을 하셨습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둘째,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안식일 문제를 풀어주십니다.
안식일에 배고픈 자들이 먹는 것과 아픈 자들을 고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 앞에서 예수님은 이삭을 잘라 먹는 제자들을 용납하시고
안식일에 손 마른자를 고치십니다.
일부러 사람들 한 가운데 세워서 고치십니다. (8)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6:9)
무슨 말입니까?
하지 않아야할 것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그들입니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의로움>입니다.
그들과 <다름>에 대한 자랑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문제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것을 <의로움>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지 말아야할 것은 하지 않은 의로움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적극적으로 <하는 삶>을 가르치십니다.
악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의로움과 자부심은 우리를 진리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은 자부심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적극적으로 <하고 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자칭 의인들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죄인들과 함께 하지 않았고
죄인들처럼 속이지 않았고
간음하지 않았고
안식일을 범하지 않았고…
모두다 않았다는 것만 자랑입니다.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지 않았기에 나는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지 않은 것을 하지 않은 <의로움>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하는 <의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이삭도 나는 먹지 않고
안식일에 죽어가는 사람도 고치지 않고
안식일을 지켰다는 자기 의가 아니라
안식일에 배고픈 자를 먹였고
안식일에 죽어가는 자를 살렸고
안식일에 목마른 자를 먹였다는
해야 할 것을 적극적으로 하는 의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곳에는 결코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는 없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것으로 바라는 보는 인생은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안식의 주인은 주님이라고 하십니다.
온 율법의 마지막 방향은 안식입니다.
그 안식의 목적,
안식의 열매는 생명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것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나는 도적질도 안했고
나는 강도질도 안했고
나는 간음도 안했고
나쁜 짓도 안했고…
안 한 것에 대한 자기 의로움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라는 말속에
나는 저 사람이 한 짓을 하지 않았다는 자기 의를 버려야 합니다.
뭔가를 안 함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하는 의로움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의인은 뭔가를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안 해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름으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부르시니 그르신 그분이 원하는 삶,
생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부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건 이후에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는 본격적 삶을 보여주십니다.
바로 열두 제자를 <부르시는 일>입니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13_)
뭔가 나쁜 짓을 하지 않음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정당화 하지 않기 바랍니다.
나는 저 사람이 하는 나쁜 짓을 하지 않은 것으로 자기 방어를 하지 않기 바랍니다.
평생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적극적으로 사람을 부르고,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보내는 일을 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자기 의에 빠진 자들의 생각을 바꾸십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시고
안식일에 배고픈 자들을 먹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는 저들과 다르다는 <자기 의>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의는 오직 그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의 의가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일은
적극적으로 사람을 부르고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보내는 일입니다.
하지 않음으로 자기 의와 자부심에 갇힌 인생에게 없는 단어 하나는
<생명>입니다.
이들은 하지 않음에 대한 자부심과 자기 의는 있지만
생명은 없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없습니다.
주님은 하지 않음으로 자기 의에 갇힌 인생이 아니라
비록 죄인으로
비록 못된 성격으로
비록 엉망된 인생의 과거로도
생명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는 일에 함께 뛰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단어에
<열심>은 있는데 <생명>은 없지 않습니까?
거룩한 <신앙>은 있는데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악한 저들과 내가 다른 이유를
저들이 한 나쁜 짓을 내가 하지 않은 것으로 위안을 삼는 것은 아닙니까?
나의 의로움의 근거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것으로 삼는 것은 아닙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 의는 없습니다.
다만 주님이 원하시는 생명만이 남을 뿐입니다.
안식일을 어기지 않고
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달리는 인생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달리는 인생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 미국의 페더럴웨이 중앙장로교회 중고등부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냈었습니다.
배굉호목사님의 첫 번째 아들인 배아론목사가 이 교회의 EM사역자로 있습니다.
중고등부 아이들과 발방크교회의 중고등부 아이들을 연결해서
크리크마스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각 아이들 앞으로 카드를 만들고 선물세트를 만들어 큰 박스 두 개를 보내오셨습니다.
인사 영상도 만들어서 보내오셨습니다.
크리스마스 전에 보낸 물건이 남천교회 선교팀 오기 전에 도착을 해서
선교팀 방문 때 선물을 나누었습니다.
평생 처음 받아보는 카드와 선물, 그것도 미국에서 말입니다.
온 교회가 축제고 잔치였습니다.
자칫 나만 먹고 사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나만 복 받고 축복을 누리고 더 나은 인생을 위해 예수를 믿는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쁜 짓을 하지 않는 이들과 다르다고
나는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다고 자랑하며
자기 의에 빠져 살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지 않은 자기 의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물질도 시간도 삶도 드리는 인생이 될 때
그곳에 주님은 생명의 역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하지 않은 것에 대한 기쁨과 자부심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부끄러음과
생명을 살리는 일에 삶을 던지는 열두 제자의 헌신의 삶이
이 천 년이 지난 지금 여기에도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다시 한번 더 Federal way Central Presbyterian Church와
배아론목사님 그리고 교인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