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라 쓰고 기회라고 읽으십니다 (눅5:1-11)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결국 두 종류의 사람입니다.
<군중과 제자>입니다.
군중과 제자는 무엇이 다릅니까?
군중은 더 가지기 위해 따르는 사람이고
제자는 버리고 시작한 사람입니다.
군중은 먹고 배부른 까닭에,
먹고 배부르고 기적을 보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 군중입니다.
그런데 제자는 시작이 다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말씀을 전합니다.
군중들, 무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많은 군중 사이에 시몬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배에 오르셨습니다.
이미 밤새 고기를 잡고 아무 소득없이 그물을 씻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동일한 말씀을 군중도 듣고 시몬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 군중과 제자가 나뉩니다.
들은 말씀에 의지하여 베드로가 예수님의 작은 말씀에 순종합니다.
평생을 그물을 던진 베드로입니다.
그에게 그물 한번 더 던지라는 말씀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가 그물을 던졌을까요?
"말씀에 의지하여" (5:5)
나에게 적용된 말씀을 순종하는 이유는
군중들과 함께 들은 말씀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군중을 향한 말씀>이 있고
<개인적 말씀>이 있습니다.
개인적 말씀은 군중을 향한 말씀에 힘을 얻어
개인적 말씀이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물을 내리라는 말씀에 순종한 이유는
군중들에게 전했던 말씀이 기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군중과 제자가 나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은 무리를 향한 말씀이 개인적 순종을 촉구하는 말씀으로 들릴 때부터입니다.
일상의 평범한 삶 속에
개인을 향한 특별한 제자로 반응하는 것은
군중을 향한 말씀이 개인적 말씀으로 들릴 때부터입니다.
반응은 부름을 전제합니다.
부르셨으니 반응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수 많은 말씀이 들리는데 그것이 개인적인 부름으로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자가 되는 순간은
평범한 삶에 말씀의 사연이 태어날 때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냥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군중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듣는 동안
개인을 향한 말씀이 찾아올 때 순종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토양을 바꿉니다.
하나님은 절대 어느 날 갑자기 예수 믿어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따라와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아무 토양의 준비 없이 말씀의 씨앗을 뿌리지 않습니다.
이미 시몬에게 군중들에게 말씀을 하실 때 그의 배에서 그 말씀을
들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셨습니다.
그의 배에서 말씀을 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첫째, 말씀을 들을 수 밖에 없는 상황!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 말씀을 들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나를 제자로 만듭니다.
주님은 내가 말씀을 들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의 상황을 만드십니다.
환경이 되지 않으면
환경이 힘들지 않으면 나라는 인간은 결코 말씀을 듣고 앉아 있지 않습니다.
인생의 실패와 인생의 아픔이 찾아와야만 말씀이 들리고
군중을 향한 말씀이 개인을 향한 말씀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시몬은 지금 그의 상황이 가만히 앉아서 어쩔수 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적으로보면 실패의 인생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고
내가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인데
그래서 나는 내 상황을 <실패>라 정의하고
주님은 내 상황을 <기회>라 평가하십니다.
내가 고기를 잘 잡고
내가 잘 나가면 그 자리에 이상한 사람이 군중들에게 말씀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앉아 있겠습니까?
주님은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게도 하시지만
그물에 물고기가 한마디로 잡히지 않게도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실패라 쓰고
주님은 기회라고 읽는 것입니다.
그만큼 시몬의 마음은 누군가의 말 한마디를 붙잡아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입니다.
처절하리 만큼 인생의 절박함이 군중을 향한 말씀이
개인을 향한 인생의 말씀으로 듣게 되고 순종의 자리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왜 시몬 베드로인가?
왜 베드로가 수제자인가? 왜 베드로를 이렇게 귀하게 쓰시는가라는 의문은 늘 가지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답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말씀에 가장
<잘 반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물고기를 많이 잡아서 변화되었다고 말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군중들에게 전했던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귀찮고 불편한 그물 던지기를 순종했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탁월합니다.
그 <탁월함>의 다른 이름은 누구보다 더 많이
<절망하는 기질>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베드로가 된 것은 감정적으로 더 많이 흥분합니다.
그러나 더 많이 절망하는 마음속에
말씀에 더 많이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군중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는 예수님의 그물 던지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힘을 얻었습니다.
평범한 말씀,
흘러가는 말씀이지만 그는 군중을 향한 말씀에 가장 잘 반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탁월함이며 절망의 깊이가 큰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에 저항 없이 순종하는 사람이 됩니다.
절망의 깊이가 큰 사람일수록
말씀에 반응하는 좋은 조건이 됩니다.
절망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으면 결코 말씀이 들리지 않는 인생이 있습니다.
절망해야 세상에 답이 없음이 보이고
그래야 하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베드로로가 경험한 기적이 그를 예수님의 위대한 제자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처절한 절망과
군중을 향한 작은 말씀에도 마음을 여는 그의
반응함이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게 되는 축복을 얻은 것입니다.
수 많은 말씀을 듣고
수 많은 예배를 드리고
수 많은 말씀을 읽지만
그 작은 말씀에 반응하는 인생이 적습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불러도 듣지 못해서 그물을 던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절망할 때까지
우리가 군중을 향한 평범한 말씀이 들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왜 베드로입니까?
둘째는 맞다고 여기면 전부를 거는 인생입니다.
군중은 가지기 위해 예수를 따르는 인생이고
제자는 전부를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인생입니다.
절망이 없으면,
세상이 답이 아니라고 여전히 믿으면
버리지 않고 가지기 위해서 예수를 믿습니다.
내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따랐던 군중처럼
수 많은 성도들은 더 가지기 위해 예수를 따릅니다.
그러나 제자는 절망의 깊은 강을 건너
인생의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며 인생에 답이 없다고
삶으로 체험한 토양 위에 예수를 위해 전부를 버리고 달려갑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 먼저 반응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사는 인생이 됩니다.
베드로는 맞다고 여기는 것에 전부를 거는 인생입니다.
전부를 건다는 것은 내가 가진 것을 전부 다 버리고 달려가는 인생입니다.
내가 필요한 것을 채우기 위해 기도하고 예수를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필요한 것을 채우기 위해 내 것을 버리는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셋째, 죄의 본질을 아는 인생입니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고 고백한 것은 자신의 죄인됨입니다.
인생을 더 가지느냐 덜 가지느냐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은 더 가지느냐 덜 가지느냐로 보지 않고
죄인이냐 아니냐로 보는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더 가지느냐 덜 가지느냐로 봅니다.
그것이 한계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향하게 하는 것은 더 많이 가지느냐 덜 가지느냐로 몰고 가지 않습니다.
그것을 위해 말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무리를 향해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과
자신을 향하여 던졌던 인격의 말씀의 결론을
물고기를 더 잡았다 덜 잡았다,
부자가 되었다 가난하다,
축복을 받았다 안 받았다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죄인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늘 축복이냐 아니냐로 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더 가졌느냐 덜 가졌느냐로 봅니다.
더 높이 올라 가느냐 아니냐로 예수믿는 것을 연관 짓습니다.
아닙니다.
인생은 죄인이냐 아니냐로 보아야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도 죄인이냐 아니냐로 본다고
말씀에 반응한다고
주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
그러나 자신의 것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평생 제자가 아니라 군중이 되고 무리가 되어 예수를 따릅니다.
호산나 호산나 외치고
환호하고 따르지만
버리지 않고 따르니 평생 <군중>이 되어 살아갑니다.
제발 내 삶을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주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제발 내 먹을 것 마실 것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사람들의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제발 더 가지기 위해 예수를 따르지 마십시오.
주님의 인격적 부르심에 응답하는 인생이 되십시오.
나 하나가 변하면 나와 함께 덤으로 오는 축복이 있습니다.
셋째, 덤으로 주어지는 축복!
베드로가 말씀에 반응하고 인격적으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신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르니
주어지는 덤은 더 부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형편이 더 나아진 것이 아닙니다.
그가 얻은 덤은 주님 곁에 있게 된 것입니다.
가장 말씀에 빨리 반응하고 가장 말씀에 일찍 반응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게 되는 축복입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그리고 더해지는 축복이 있습니다.
나로 인해 사람이 오게 됩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이후로 사람을 얻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한 야고보와 요한이 저절로 얻게 되었습니다.
내가 내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면 내 주변의 사람을 얻게 됩니다.
내가 예수를 따르는데 내 주변의 사람이 나를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아직 내 것을 버리지 않고 따르는 것입니다.
평생 예수를 믿었는데
사람들이 나를 통해 예수를 따르지 않는다면 아직 군중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말씀을 결국 사람을 얻기 위함입니다.
평생 사역을 하고 사람이 주변에 없습니다.
평생 예수를 믿고 사람이 남지 않습니다.
아직 제자가 아니라 군중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내가 말씀에 반응하고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내 가진 것을 버리고 좇을 때 나타나는 열매는 결국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고백만 했는데 벌써 시대를 바꿀 야고보와 요한이 붙습니다.
비록 형편이 어렵고
비록 내 살림이 나아지지는 않지만
사람이 남았다면 우리는 제자입니다.
혼자 예수를 잘 믿겠다는 것은 군중들이나 하는 소리입니다.
예수를 따르고 떡이나 먹고 기적이나 보겠다는 군중들의 소리입니다.
제자는 버리고
제자는 사람이 남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걸고 주를 따르기로 각오하고
목숨을 걸고 주를 위해 자신의 삶 전부를 던지는 사람이 남는 것!
그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베드로는 실패한 어부로 주님 앞에 섰지만
그는 그 실패로 주님께 반응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실패가 쓰지만 주님은 기회라 읽습니다.
지난 밤 실패가 오늘 이 아침에 기회가 되어 찾아옵니다.
군중을 향한 평범한 말씀도
내를 순종하게 하는 것은 내 인생의 <실패의 토양>이
말씀의 <씨앗>을 자라게 하기 때문입니다.
실패의 토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관심은
오늘도 고기가 얼마나 잡혔느냐에 있습니다.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5:9)
그것이 절망과 실패를 알지 못하는 인생의 관심입니다.
인생은 고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더 가졌느냐 더 높으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이 첫 마음을 잃어버리면 십자가에 죽으신다는 주님의 말씀에도
누가 높으냐로 변론하게 되어버립니다.
우리의 인생의 결산은 고기가 얼마나 많으냐가 아니라
얼마나 사람을 남겼냐입니다.
그것이 실패한 시몬의 인생을 부르신 이유이고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 나와 여러분을 부르신 유일한 이유입니다.
당신의 관심은 <고기>입니까 아니면
<사람>입니까?
* 선교팀이 가시고 배굉호목사님과 정은일목사님
그리고 선교부 장로님들과 함께 전체 사역자 세미나를 했습니다.
매년 선교지를 오시면 두 분의 목사님과 함께 전체 사역자를 모시고 세미나를 가집니다.
사역자로서의 삶의 자세와 마음 그리고 목회자로서의 기본 소양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각 교회의 사정을 보고받고 계획과 그에 필요한 일들을 의논합니다.
점심으로 한인교회에서 제공한 최고의 식사를 나누고 소정의 격려금을 전달합니다.
일년의 한번이지만 사역자들이 기다리고 기뻐하는 시간입니다.
총 26명의 사역자 중에 모잠비크 사역자와 개인적인 업무로 몇 명이 빠지고
21명의 사역자가 모였습니다.
다른 사역팀보다 사례를 많이 주지도 못합니다.
그렇다고 많은 후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집도 차도 주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를 영적인 아버지로 영적인 스승으로 좋은 친구로 여깁니다.
신뢰와 사랑에 바탕을 둔 우리의 사역자들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늘 그렇습니다.
<사람>입니다.
자신의 것 다 버리고 달려가는 이들을 보는 것이
그저 <축복>입니다.
교회를 더 키우려고
일을 더 벌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만나게 하신 사람들,
하나님이 주신 사람들과 좋은 마음으로 마음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고 그들이 자라도록 마음을 썼을 뿐입니다.
사람에 집중하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람이 세워지도록 하는 것이 저의 일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덤으로 주십니다.
저는 제 인생을 실패라 쓰고
하나님은 제 인생에 기회로 읽으십니다.
그것이 그저 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