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움직이는 사람
여호수아10:1-15
세상에는 분명히 하나님을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춤추게 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을 가슴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움직이시지만
그 하나님을 움직여서 일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세상의 역사와 민족과 사람은 하나님이 움직이시지만
세상에 몇 안 되는 사람은
그 하나님을 움직이게 한다.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사람!
하나님을 일하게 하는 사람!
하나님을 춤추게 하는 사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찾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뭘 할 때 움직이시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반드시 흥분하시는 것이 있다.
하나님이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이 있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우리가 그 일을 할 때는 하늘의 천사를 동원하고
하늘의 능력을 동원하시는 일이 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하늘의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분이 직접 일하시는 일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원수를 멸하는 일이다.
원수를 멸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가만히 있지 않으시고 직접 일하신다.
이 일을 할 때는 하나님도 가만히 있지 않으신다.
하늘을 움직이고
천사를 동원하고
불 말과 불 병거를 동원하시고
초자연적 기적을 베푸신다.
기브온이 오라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니다.
화친을 맺었다고 가는 것이 안다.
세상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아모리의 다섯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올 때 거침 없이 달려간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들이다.
하나님의 대적들이다.
그들이 오늘 싸움을 해서 이긴 것이 아니다.
하늘에 큰 덩이 우박을 내리셔서 죽이신다.
성경은 말하기를 칼로 죽인 것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욱 많았다고 설명한다.
[수10:11]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우박 덩이를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았더라
여호수아가 이 싸움을 하기 바로 전에 실수를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문제를 삼지 않고 더 많은 기적을 여호수아와 함께 하신다.
뿐만 아니다.
여호수아가 하늘을 향하여 소리를 치자
태양도 머무르고 달도 멈춰 서서 그들이 싸움에서 이기기까지 온종일 머물러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온 우주적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태양도, 달도 멈추어 섰다.
태양이 멈췄다면 태양계가 멈추었다는 말이다.
우주적, 초 자연적 기적이다.
문제는 이것이 왜 일어 났는가이고
언제 일어났는가이다.
답은 간단하다.
가나안 땅의 거민들, 영적으로 하나님의 대적들, 원수들을 무찌르는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을 제하는데
하나님은 가만히 있지 않고
하늘의 우박은 물론
온 우주를 움직여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본다.
원수를 결박하는데,
원수를 몰아내는데,
원수를 대적하는 일에는 하나님이 직접 간섭하시고
직접 하나님께서 움직이신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실수하고
연약해서 해서는 안될 일들을 한다 해도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드릴 때
그분이 그렇게 원하시는 창세로부터의 원수를 대적 할 때
그분은 우리와 함께 일하시고
우리의 목소리를 청종하시고 들으시고 응답하셔서
우주적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다.
수10:14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대적을 나의 대적으로 여기고 싸울 때 그분은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신다.
우리 평생에 일어날수 없는 놀라운 기적들을 베푸시고 나를 위해 싸우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지막 원수인 사망도 결국 멸망하여
우리에게 사망이 사라지게 하시기를 원하셔서
그 사망을 죽이기 위해
그리스도 그분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셨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와
음부의 권세와
사망을
결국 싸워 멸하실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고전15:26]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그래서 우리의 싸움은 겨우 나의 직장이나,
돈이나,
명예나,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싸움은
[엡6: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이것을 바로 알고 분별하고 영적 진보가 있을 때 그분은
직접 움직이셔서 우리와 함께 싸우실 것이다.
겨우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으로 그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겨우 세상 이방인들도 구하는 것으로 하늘을 움직일 수 없다.
그분이 흥분하는 것,
그분이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
그분이 움직이는 것을 붙들 때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늘을 여시고
천지를 움직이는 일을 하실 것이다.
언제 하나님이 그렇게 움직이시는가?
언제 일어나는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것에 < 모든 것 >을 바칠 때 이다.
7절을 보면 모든 군사와 용사들이 올라갔다고 했다.
수10:7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용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올라가니라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언제 하나님의 음성이 완벽하게 들리는가?
언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확증하여 주시는가?
발걸음을 옮길 때이다.
< 올라가니라 >
이 말속에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는 계산하지 않았다.
적이 얼마나 많은지
이길 승산이 있는지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움직였다.
언약궤와 제자장들의 발이 물속에 들어갈 때 물이 갈라졌다.
모세가 지팡이를 내밀 때 홍해가 갈렸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들어갔다 나오실 때 하늘이 열렸다.
그분이 원하시는 원수를 위해 움직일 때이다.
가나안의 엄청난 적들이 모였다.
될지 안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있다는 소리에 갈등 없이 올라간다.
단서가 있다.
< 모든 >이다.
언제 하나님이 함께 움직이는가?
모두를 걸 때이다.
올인 할 때이다.
'모든'은 확실함을 말한다.
내가 생각한 것이 맞다고 확실히 100% 확신할 때 모두를 건다.
뭐가 확실했는가?
이길 승산인가?
내가 이길 수 있다는 승산인가?
아니다.
단 하나!
하나님이 이것을 원하신다는 분명한 확신이다.
그것이 확실하다면 모든 것을 걸 수 있다.
왜 우리가 갈등하는가?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에게 뭘 기대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무엇에 그분의 모든 이름을 거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싸우길 원하신다.
그분은 그분의 원수와 싸우길 원하신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은 용사라고 한다.
[출15:3]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분이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일치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걸 수 있다.
내가 원해서도 안되고
그분만 원해서도 안 된다.
그분이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일치함을 확신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걸 수 있다.
여호수아는 그것을 알았다.
그분이 뭘 원하시는가!
원수를 멸하는 것!
대적을 멸하는 것!
지체하지 않았다.
소식을 듣자 바로 모든 군사와 용사로 더불어 달렸다.
그러자 바로 그때에 여호와께서 확신을 주신다.
10:8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그들 중에서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뻤으면 올라가는 중간에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움직이는 순간이다.
그분이 그렇게 원하는 것을 내가 할 때 그분은 바로 움직이신다.
그분이 가만히 있지 못하신다.
그분이 진정 원하는 것 그것을 우리가 할 때 그분은 끈임 없는 확신과
담대함과 용기를 주신다.
8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그들 중에서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
얼마나 좋으셨으면
얼마나 기대가 되셨으면 가는 중간에 확신과 뜨거움과 용기와 격려를 보내신다.
밤새 올라갔다.
쉬지 않고 갔다.
10:9 여호수아가 길갈에서 밤새도록 올라가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니
이제부터는 우리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이 되는 것이다.
우박과 하늘의 태양도 달도 머물러 우리가 승리하도록 함께 싸우고 있다.
모세의 백성과 여호수아의 백성이 다른 것
홍해를 나온 백성은 겨우 자기들의 먹고 마시는 문제 때문에 기도했다.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러자 겨우 먹을 것만 얻었다.
겨우 생명만 부지 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적,
세상의 영,
세상 잡은 권세,
영적 원수,
악의 영들을 대항하며 나아가자
세상이 나고 단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큰 우박이 떨어지고
하늘도 천지도 멈추며
칼이 휘둘러 지는 곳마다 승리가 보장되는 축복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늘 우리의 안전과
우리의 가족과
편안한 삶을 보장해 달라고,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달라고 겨우 기도하고 살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문제는 제발 좀 내려 놓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했다.
그 의와 나라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필요한 것,
영적 원수를 대적하며
멸하며 싸우는 일이다.
나라를 세우는데 겨우 내가 있는 곳에서
땅이나 파고 가축이나 치고 있는 것으로 그분의 나라가 완성 될 것인가?
겨우 내 가족이나 지키고,
내 미래를 위해 저축을 좀 더한다고
그분의 나라가 올바르게 세워 질것인가?
그분이 관심은 악한 영들,
그분의 적을 함께 무찌르는 일들이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싸우며 나아가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기도 제목을 내려 놓아야 한다.
안일하게 겨우 목수만 부지하는 수준의
광야 모세의 백성들이 하던 기도는 던져야 한다.
주여!
나에게도 능력을 주옵소서.
하늘을 움직이고
하나님을 움직이는 능력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엘리야도!
엘리야를 기억하는가?
엘리야는 체질적으로 약한 사람이다.
먹고 마심에 보장 받지 못해
까마귀를 통해 먹을 수 있고
사르밧 과부를 통해
생명이 주께 있음을 훈련하고 배우고서야 전장에 나갈 수 있는 약한 자였다.
그런 그지만,
하나님 앞에 거짓 선지자 850명과의 싸움에서
하늘의 불로 그들을 심판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그가 잘해서인가?
그가 능력이 있어서 인가?
모두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싫어 하시는 사람들,
하나님이 원하시는 원수를 대적하는 일에 전부를 걸어서 그렇다.
전부를 걸어야 한다.
사랑의 조건
사랑할 때 조건이 있다.
[마22: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하나님을 사랑할 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아니다.
조건은 < 다하고 > 이다.
무엇을 하든지 다하여 해야 한다.
모두를 걸어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맞다 싶으면 다해야 한다.
전부를 걸어야 한다.
값진 진주 장사와,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의 이야기 핵심은
진주와 보화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 전부 >를 팔아 이다.
마귀도 예수님을 시험할 때 모두를 걸었다.
[마4: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고치시고 모든 약한 것을 돌보셨다.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귀도 예수님도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 모든 것을 거셨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모든 것을 걸라고 하신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왜냐하면
그분이 모든 것을 거셨기에
우리가 모든 것을 걸 때 그분은 직접 움직이시고 일하신다.
내가 잘하는 한가지!
내가 능력 있는 그것에든지 무엇이든지,
우리가 모든 것을 걸 때 하나님은 움직이신다.
예수님이 일어서는 순간!
스데반의 순교를 기억하는가?
그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에 모든 것을 걸었다.
결국 순교하는 순간에
하늘의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이 벌떡 일어서서 그를 맞고 계신다.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전부를 걸 때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전부였던 이삭을 바칠 때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야곱은 자신의 전부였던 목숨을 걸고
하나님과 씨름할 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갈등하다 모두를 잃을뻔했지만
하나님의 기적으로 자신의 전부를 광야 백성에게 걸었고
그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요셉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성실 전부를 걸어서 이스라엘의 생명을 보전하게 되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돌아 맞아 죽을 각오로
믿음의 고백,
온 마음을 다한 고백으로 가나안을 정복하며
하늘의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하는 역사를 만들어 냈다.
모든 것을 바친 하나님의 마음에 모든 것을 바치지 않는 사람은
마음에 합한 자라 칭할 수 없다.
다윗은 모든 것을 다하여 그분 앞에 살았다.
나는 그분이 원하는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가?
지금 나에게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한가지 있다.
나는 이제 그것에 다시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나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하나님을 위하여
나는 그분을 움직이기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이제 걸어야 한다.
하나님은 좀 움직이길 원하신다.
우리가 그분이 원하는 그 일을 할 때
그분은 함께 감격하며
함께 뛰시며
함께 하늘의 천사와 능력을 통하여
일하길 원하신다.
왜 12제자 인가?
왜 예수님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바리세인이나 서기관들을 제자로 택하지 않으셨나?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전부를 걸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니다.
그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이 믿는 그것에 전부를 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부르신 것이다.
마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린 이들에게 지금 세상에서 몇 배의 보상을 받고
뿐만 아니라 올 세상에서도 열 두 지파의 보좌에서 세상을 심판 할 것이라 했다.
제자와 군중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은 오직 두 부류이다.
제자와 군중이다.
어떻게 구분이 되는가?
간단하다.
전부를 건 사람은 제자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군중이다.
부자 청년을 기억하는가?
모든 계명을 지킨 자이다. 그러나 부자여서 가진 것을 나누라 할 때 심히 근심하며 간 사람이다.
그는 분명히 군중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계명을 지켜도 전부를 걸지 못하면 우리는 끝까지 군중이다.
[눅14:33]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교회에서 직분도 맡고,
봉사도 이것저것 할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전부를 걸지 않을때
다하여 하지 않을때
우리에게 제자라 말하지 않는다.
군중이라 말한다.
성도 중에는 군중이 있을 것이다.
직분자 중에도 군중이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목사에게도 군중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제가 군중이었다면
오늘은 모든 것을 거는 제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분이 원하는 그 하나님 나라에 전부를 걸어라.
겨우 내 먹고사는것,
내 사람,
내 성과,
내 업적에 이방인들처럼 구하지 말라!
여호수아가 전부를 걸어 가나안을 차지한 것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은 제자들이
현세와 내세에 받을 축복을 보장받은 것처럼
우리도 그분이 원하는 그것에 전부를 걸어
하늘의 축복을 누리는 제자가 되고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하늘을 움직이고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대하16:9]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 전심으로 >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