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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는 <고쳐 주시니>까지 가야 합니다

나귀는 <고쳐 주시니>까지 가야 합니다

 나귀는 <고쳐 주시니>까지 가야 합니다.  (21:1-17)

 

세상이 원하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은 내가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높은 자리에 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평생을 그렇게 속아서 살아갑니다.

 

예루살렘에 가까와지자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힘을 없애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왕의 화려함이 아니라 초라한 나귀를 친히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21:2)

 

세상을 위하십니까

세상을 정말 위하고 아낀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야합니다

낮은 자리로 가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놓은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원하는 방법대로 살아갑니다.

높은 , 크게 되는 것을 꿈꾸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루지 못하는 때문에 평생 허전함과 허무함으로 살아갑니다.

세상은 높은 , 것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꿈이란 것을 많은 보통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됩니다

오르면 올라야 하는 자리가 있고 

어느 정도 높아지면 나보다 높은 자리가 있음을 돌이킬 없는 시간이 되어서야 알게 됩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과 반대로 갑니다

세상 시작의 근원은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오실 메시야가 나귀를 타고 오실 것을 미리 예언했습니다

미리 알고 가야합니다

미리 알고 오신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고 더더욱 세상이 꿈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꿈을 이룰

내가 높아지고 내가 커지고 내가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한 방편으로 예수님을 이용합니다

 

우습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대한 답으로 나귀를 타시는데

우리는 세상에 높아지기 위해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이용합니다.  

코미디입니다

개그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구원하라고 소리칩니다

호산산 호산나

말은 '구원하소서'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구원하라고합니다

우리의 상식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꿈을 꾸어야 합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힘을 가지고 높은 자리를 꿈꾸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주님은 반대로 하십니다

나귀를 타십니다

구유에 나셨고

선한 것이 없는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

쓸모없는 어부들이 그분의 제자들입니다

말을 해도 못알아 듣는 제자들입니다

그분의 친구는 인맥도 없고 어디 비빌 구석도 없는 죄인들이고 세리들이고 창기들입니다

세상의 방법으로는 절대 세상이 요구하는 우리를 구원하라는 말씀과 너무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은 

사단이 에덴동산에서 시도했던 힘을 가져서 구원하려는 길이 아닙니다

사단이 가는 반대

높아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낮아져서 낮아져서 구원하는 길을 놓으십니다.  

세상은 절대로 하지 못하는 길이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회복하고 싶은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힘이 아닙니다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회복하고 싶은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능력과 살아계심과 심판과 구원을 믿는 자만이 

땅에서 나귀를 있습니다

천국을 믿는 사람만 죄인들과 친구가 있습니다

정말 부활을 믿는 사람만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갈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화려함과 능력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믿음> 입니다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잃어버린 것은 힘도 능력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나귀를 타십니까

겸손입니다

낮아짐입니다

땅에서 낮아지고 겸손하십니까

하나님이 높이실

하나님이 살리실 것을 믿는 사람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믿음이 있을 사는 삶의 모습이 바로 나귀를 타는 삶입니다

높아지기 위해 시작된 죄의 근본에서 낮아짐으로 믿음을 증명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이신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삶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 후에 나오는 이야기는 믿음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여 마르게 하는 사건입니다

시장하여 무화가 나무에서 열매를 찾았는데 열매가 없자 예수님이 열매 없는 나무를 저주하여 마르게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묻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그러자 예수님은 <믿음>이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21:21-22)

 

나귀를 타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나귀를 타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증명하는 삶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세상을 향하여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을 증명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힘을 증명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증명하는 것을 사단적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나의 나 됨을 능력으로 자리로 권세로 힘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오직 믿음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나귀를 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만 구유에 나고

아무 선한 것이 없는 나사렛에서 있고

왕이지만 초라한 나귀를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나귀는 타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상을 엎으십니다

매매 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고 바꾸는 사람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의 의자를 엎으십니다

왜요

성전은 기도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21:13)

 

누가 기도합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만 기도합니다

그런데 성전이 어떤 곳이 되었습니까

매매하는 사람들의 장소입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의 장소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성전이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생각과 세상의 마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반대> 의심이 아니라

<합리와 이성>입니다

 

믿음으로 서야 성전이 타당하고 합리적이고 계산적이 되는 것이 타락입니다.

 

기도가 무너지는가

기도는 믿음이 사라지면 무너집니다

에덴동산에서 믿음을 잃었습니까

합리와 이성입니다

세상과 악한 영은 우리를 무너 드리려고

의심의 <> 합리와 이성이라는 <> 입고 찾아옵니다.

 

믿음이 있을 때만 기도하는 성전이 

합리와 이성으로 계산과 욕심으로 가득 할 무너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너지는 이유는 믿음의 길을 걷지 않고 합리와 이성이 득세할 때입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 교회는 무너집니다

그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서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런데 <기도의 반대> 기도 하지 않음이 아닙니다

<믿음 없음>입니다

 

믿음 없음의 모습은 바로 합리와 이성

타당과 비판

계산과 논리로 찾아옵니다

 

성전에서 장사를 하기 시작한 것은 사람이 키운 제물은 안되고 

구별해서 키운 것만 드려야 한다고 그것을 비싸게 팔고

세상 돈은 안되고 성전에서만 사용하는 돈으로 바꾸면서 세금을 많이 걷고 

그런 모든 일에는 종교지도자들이 뒤에서 조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시작한 의식과 제도입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입니다

그러나 속에는 믿음이 사라진 이유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이성과 합리고 이성과 합리의 배경에는  

커지려고 하는 욕심과  가지려고 하는 높아짐이 있습니다

 

높은 사람들이 악하고 

사람들이 믿음이 없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무리들을 어린 아이들이라 칭하면서 어린 아이들의 노래를 듣고 노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21:15) 

 

이미 자리를 가지고 권력을 가진 자들의 귀에는 어린아이 같은 무리들의 노래가 불편합니다

믿음으로 자기의 자리를 지키며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이 불편합니다

 

믿음으로 이성적 장사치와 

믿음으로 합리적 욕심의 매매 하는 자들을 쫓는 것도 불편합니다

 

왕이면 답고 화려하고 놀랍게 나타나야 하는데 

겨우 나귀를 타고 오는 모습도 불편합니다

이미 가진 자들의 마음입니다

잘하려는 것을 보면 마음이 불편하고 

믿음으로 하려는 것을 보면 속이 뒤틀립니다

 

믿음 없이 세운 모든 세상의 것은  

믿음이 찾아오면 불편해 집니다

아니 세상과 믿음은 이미 충돌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믿음을 버리고 높아짐을 택한 세상은 

믿음이 우습습니다

겨우 나귀를 타고 오는 것이 불편합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만 찾으십니다

믿음이 답이라고 하십니다

 

믿음의 길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계산적인 생각을 멈추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시작한 방법들이 

결국은 기도를 몰아내고 기도하지 못 하게하고 

성전을 무너뜨리는 일이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주님은 성전이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함을 상을 엎으시면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사라지면 나타나는 가장 근본적인 증상은 

합리와 이성이 득세하고

말을 잘하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 되고 

그리고 기도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인생에 기도가 사라지면 

내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변했다고 보시면 정확합니다

<기도> 합리와 이성이냐 믿음이냐를 결정짓는 잣대입니다

  

 

주님은 상을 엎으시면 오직 기도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입니다

그곳에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십니다 .

강도의 소굴은 칼을 들고 총을 강도가 아닙니다

뱀처럼

악한 영처럼 

합리와 이성으로 한마디로 찾아오는 <계산적 판단>입니다

 

 

<합당한 > 찾지 마십시오

믿음은 합당한 길이 아닙니다

너무 <이성적인 > 구하지 마십시오

믿음이 길은 절대 이성적으로 이해할 없습니다

 

합당한 것을 찾는다면 주님은 같은 사람을 부르지 않고 똑똑한 사람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이성적인 것을 찾은 다면 주님은 논리적인 사람을 통해 일하실 것입니다

나의 삶을 봐도 주님은 합리적이지 않고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교회가 교회답고 

성도가 성도 다운 것은 이성과 합리로 사는 것이 아니라

손해보고

낮아지고 

구차해도 

믿음의 길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를 살리고 

그것이 세상을 살리는 방법입니다

 

줄까 말까를 고민하면 줘야 합니다

살까 말까를 고민하면 사지 말아야 합니다

말할까 말까를 고민하면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내가 해야만 되는 이성적 판단이 서면 불편한 말을 합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합니다

말을 하면 속을 후련하지만 

말을 한다고 사람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나귀를 타신 삶을 어떻게 증명하십니까

성전에서 상을 엎으시고 

매매하는 자를 쫓아내시고 

의자를 엎으셨습니다

 

첫째, 나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귀를 타신 주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약한 자들

아픈 자들

나를 필요로 자들에게 나의 <손을 미는 > 입니다

그들을 <고쳐주는 > 입니다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21:14)

 

 

세상은 합리와 이성으로 비판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비판하고 

성도가 교회를 비판하고 목사를 욕합니다

목사도 목사를 욕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상을 엎으시고 매매하는 자들을 쫓아 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리고 약한 자들과 

힘이 없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는 나귀도 탑니다

겸손한 모습도 보입니다

교회의 약한 모습에 비판도 하고 개혁도 외치고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상도 엎어버립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처럼 맹인과 저는 자들의 손을 잡지는 않습니다

아프고 외로운 눈물의 인생들의 친구가 되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겸손은 무엇입니까?  

나귀를 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상을 엎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가장 약한 자들 곁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나의 필요를 원하는 자들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물을 닦고 그들의 걸음에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믿음이 있음의 다른 말은 약한 자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귀 타는 일이고 

그것이 믿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나귀도 타셨습니까

사람들에게 겸손한 모습을 보이셨습니까

하셨습니다

 

교회를 향하여 교회가 이래서는 된다고 소리도 치시고 

고참도 치시고 상도 엎으시고 사람도 쫓으셨습니까?

하셨습니다

 

그럼 약한 자들과 

없고 나의 도움이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눈물 흘리는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까

그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을 찾아가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셨습니까

 

<고쳐주시니> 삶이 없는 나귀를 타는 일과 

상을 엎고 소리를 치고 사람을 쫓는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힘을 빼고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고

나귀를 타고 

성전을 바르게 잡는 의로움은 다른 일이 아닙니다

 

나의 필요를 원하는 곳에 

그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향하여 욕을 하고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해서는 안되다고 외치며 상을 엎은 사람일수록

많이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 사람은 대제사장이나 서기관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기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자리를 넘보는 자들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을 그분이 걸어가신 길이 답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길을 걷는 것입니다

길은 나귀를 타는 겸손과 

이성과 합리가 아니라 믿음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믿음의 길의 집합체는 바로 나를 필요로 하는 자들과 마음을 같이하고 

실제적인 고침의 자리

실제적인 도움의 자리까지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신앙!

하나님의 아픔입니다.

 

여러분의 필요를 원하는 사람!

사람에게 가셔서 여러분의 나귀를 타는 일을 환성하십시오

나귀를 타는 일은 <고쳐 주시니> 일까지 가야 합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것이 나를 세우신 이유입니다.

<믿음의 증명>입니다.

 

 

 

 * 가덕교회 이성수목사님 가족입니다.

 

제가 전도사 1학년 때입니다.

전도사지만 간사로 일년을 봉사했습니다.

사례는 천안까지 가는 차비와 헌금을 내면 맞았습니다.

부모님 집에 함께 사는 시절, 생활비는 전혀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이목사님께서 하루는 봉투를 주셨습니다.

10만원이었습니다. 지금도 크지만 그때도 적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동안을 매달 그렇게 주셨습니다.

자신의 기름값이 교회에서 10만원 올랐다고 오른 돈을 저희 가정에 주셨습니다.

얼마나 은혜 인지요.

 

2011 가덕교회에서 가덕교회 선교관을 제일 먼저 사용한 선교사의 선교지로 선교를 온다고

하시고 처음 가덕교회 선교관을 사용한 저의 선교지인 남아공으로 청년들과 오셨습니다.

10 전에 받았던 사랑의 빚을 갚았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났습니다. 은혜는 평생 갚는 것이다.

 

 

2012 안식년을 가기 전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한국 가서 무엇을 할까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위로하라 였습니다.

 

이목사님 가정을 위해 기도하다 함께 여행을 가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목사님 가정을 모시고 전국을 다녔습니다.

기름값은 한숲교회의 형제가 도움을 주셨습니다.

일주일 일정을 잡고 여행을 다녔습니다.

 

서울에서 사역을 하셨고

부산에서도 사역을 하신 목사님의 가족이 가덕도 섬으로 가셔서 목회를 하십니다.

가족들을 위한 일은 가족을 모시고 섬을 나오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여기 저기서 주시는 용돈으로 이목사님 가족과 여행을 신나게 다녔습니다.

 

다니면서 알았습니다.

많은 가덕교회를 찾아오시는 분들 섬기시느라 아이들 ,

아이들 신발 한컬례 사주지 못하고 먹을 제대로 사주지 못했음을.

그때 알았습니다.

10 차비가 올라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저희 가정을 향한 사랑과 헌신임을 말입니다.

 

이성수목사님은 나귀를 타십니다.

그리고 성전의 상을 엎고 이렇게 해서 안된다고 외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가정은 가난하고 외롭고 인생의 길이 무거운 가난한 사역자의 삶에

<고쳐 주시니>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셨습니다.

약하고 힘든 자들에게 손을 미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지금의 모습은 바로 이목사님 가정과 같이

가난한 사역자의 외로운 길에 <고쳐 주시니> 은혜로 세워진 사랑의 은혜입니다.

 

어디 이목사님 뿐입니까?

나에게 손을 내신 많은 분들,

그리고 일일이 기록하지 못하지만 남모르게

<고쳐 주시니> 삶으로 다가오신 많은 보석 같은 사람들 때문에

지금의 저로 부족하고 허물 많으나 지금의 저의 모습으로 서있게 것입니다.

 

 

10만원은 평신도로 살다가 사역자로 처음 받아보는 섬김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나귀를 타는 모습이었음을 오랜 시간이 지나서 깊이 깨닫습니다.

안식년 가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왔습니다.

나름 한다고 <고쳐 주시니> 빚을 갚는다고 갚지만 그러나 기억합니다.

<평생 갚아야 하는 은혜> 것을!

 

저에게 이런 분이 있습니다.

평생 갚아야 하는 은혜의 빚을 분들이 말입니다.

 

저는 압니다.

사람은 상을 엎는다고 나귀를 타는 흉내를 낸다고

매매하는 사람을 쫓는다고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오직 <고쳐 주시니> 내미는 사랑이 어야 변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믿음의

<고쳐 주시니>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고쳐 주시니> 세워지고 고침을 받고

회복되고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기회가 되는대로 저에게 이런 <고쳐 주시니> 은혜를 알게 하신 분들을 소개하려합니다.

이성수목사님과 가정에 가슴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사랑합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