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것을 회복하려면 반드시 10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여호수아8:1-29
지혜가 뭔가?
좋을 때 잘 하는 것이 지혜이다.
축복이 어디서 오는지 아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 말고는 우리 인생에 없다.
한번 그 말씀에 불순종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데 드는 노력과 힘은
10배 이상이 든다.
오늘 아이성 전투를 아간 때문에 실패하고
아간과 그 온 가족을 돌로 쳐죽이다 못해 불로 태워 죽였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하나님의 공동체가 순결하며 거룩하기를 원하시는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
문제는 그때부터다.
하나님께서 물론 용서하시고 다시 함께 하시지만
잃어버린 영적인 문제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영적 상태가 좋을 때는 10 정도의 힘이 필요하다면
떨어진 것을 회복하는 대는 100의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다.
아니 그 이상이 필요하다.
아이를 처음 치러 갈 때 삼 천명이 갔다.
좋을 때 그냥 가면 아이성은 이스라엘 것이 된다.
하지만 영적으로 문제가 생기고 그것을 다시 회복할 때는 삼 만 명이 올라갔다
그것도 모자라 앞뒤로 오천 이상,
그리고 미끼를 위해 여호수아가 장로들과 직접 죽을 각오로 앞에서 유인해야 한다.
교회는 영적으로 흠이 나면 회복하는데 너무 힘들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는 좋을 때는 하나만 잡으면 되지만
안좋을때는 많은 것을 잡아야 한다.
영적으로 좋을 때는 그저 눈에 보이는 적과 싸우면 된다.
오직 순종만 하면 된다.
이것저것 계산하고 따질 필요가 없다.
이미 말씀을 가지고 시작했다면 말씀이 가게 한다.
순종만 하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떨어지고 나면 또 다른 것과 싸워야 한다.
그것은 내부의 보이지 않는 적이 생긴 것이다.
영적 무기력,
영적 패배의식,
영적 두려움이 그것이다.
올라갈 때는 오직 말씀 순종에만 신경을 쓰면 되었다.
하지만 내려왔다 다시 올라가는 영적 문제는
순종하지 못했다는 마음의 죄책감,
영적인 패배의식,
그리고 하나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뒤에서 나를 잡아 당긴다.
또 실패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함까지 찾아온다.
거기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적!
사탄이 나의 환경을 더욱 꼬이게 만든다.
그래서 회복할 때는 10배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말씀하셨다.
눅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베드로가 시험이 들어 예수님을 부인하고 영적으로 회복하기를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겠다는 말씀이다.
개인이나 공동체가 한번 영적으로 힘을 잃어버리면
다시 회복 얼마나 힘든지 예수님께서 직접 기도하고 기도해야 겨우 일어설수 있다.
이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둘째는 서로에 대한 불신이 생긴다.
서로 믿어주지 않는다.
우리 중에 또 저런 놈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경계와 견제,
어느 놈이 내 편이고 어느 놈이 적군인지 눈치를 보게 된다.
편가르기가 시작이 되는 것이다.
천국을 이루는,
교회가 세상에서 언제 힘을 쓰느냐?
오직 하나다.
하나됨!
교회는 하나될 때 교회다울 수 있다.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면 자기 몸 돌본다고 적들과 싸우지 못한다.
언제 이스라엘이 적을 향하여 가던 발걸음을 멈추는가?
하나됨이 깨어질 때이다.
하나되지 못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힘을 기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됨이다.
아니 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하나되는 것이 가장 강력한 힘이다.
맞다 아니다,
이것이다 저것이다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냥 틀려도 한 마음이면 하나님이 교정하여 주신다.
그래서 성경은 많은 곳에서 이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과 하나됨!
교회가 하나됨!
서로가 하나됨!
셋째 부정적인 토양이 생긴다.
개인도 그렇지만 공동체도 토양이다.
말씀은 씨요 우리는 밭이라 했다.
이 토양은 계절과 같아서 한번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반드시 겨울이 온다.
토양이 알카리성에서 산성으로 변하면 그 성질은 변하는데 굉장한 시간을 요한다.
기무라 아키노리라는 일본의 한 농부가 있다.
이 사람은 사과로 엄청 갑부가 된 사람이다.
이 사람이 만든 사과로 만든 스프를 먹으려면 6개월을 기다려야 한단다.
왜 이 사람의 사과가 이렇게 유명해 졌는가?
이유는 하나다.
땅이다. 토양을 변화시킨 것이다.
농약이 없으면 죽는 사과나무!
그런데 그는 농약 없는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다 망해 자살하려 했다.
그러다 깊은 산속 도토리 나무가 어떤 시련에도 죽지 않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사과 나무를 잡초 가운데 버려두고 자기 마음대로 자라도록 놔두었다.
9년이 지나자 사과가 하나 열렸다.
그리고 매년 시간이 갈수록 엄청난 사과가 나오고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는 사과나무가 되었다.
사람들은 조금 문제가 생기면 자꾸 말을 한다.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되고.
그래서 간단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입막음하고 이래서는 안 된다고 조치하고 한다.
그런데 겉은 열매가 열리지 모르나 온통 농약으로 중독된 땅에서 자란 열매는
건강하지 못한 열매들이다.
약간의 자연 재해만 오면 다 떨어지는 약한 것들이다.
하지만 금방 열매를 따기 위해 약을 쓰면 쓸수록 토양은 죽어간다.
약을 쓰지 않으면 금새 열매를 맺지 못하는 약한 토양이 되는 것이다.
사과 하나 열리는데 9년이 걸렸다.
토양이 제대로 된 자연의 모습으로 변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건 10년이다.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
동일한 원리를 주셨다 믿는다.
왜 한번의 죄가 무서운가?
이 토양이 부정적이며 견제하며 소망이 없는 말과 마음이 지배하면
부정적인 그 토양이 변하는데 10년이 걸린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어느 교회든지,
부서든지,
공동체이든지,
개인이든지!
한번 부정적인 부서, 교회는 그 토양을 바꾸는데
한 교역자가 반평생을 고생해야 한다.
아니 변하면 감사하지만 변하지 않는 모습을 많이 본다.
한번 잃은 정직과 부정적인 말과 마음은
땅의 토양이 변하기 어려운 것처럼
그 마음의 성질을 바꾸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할 때
일을 하려 하지 말고 토양을 먼저 바꾸어야 한다.
사람의 행동을 바꾸려 하지 말고
그 마음의 성질, 토질을 바꾸지 않으면 소망이 없다.
토질은 갈아 엎어야 바뀐다.
잡초를 뽑고,
땅을 파서 자갈과 돌맹이를 걷어 내야 한다.
아파도 반드시 해야하는 것이 이 일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기에 가나안에서 원하신 것이 다 죽이라는 것이다.
비록 믿음의 백성이어도 토양을 어지럽히는 자는 중죄로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간은 물론 가족 친지 짐승까지 다 멸종했다.
가나안 족속 생명은 다 죽이라 했다.
토양의 문제다.
옥토는 계속 옥토로 두어야 씨를 통해 열매를 맺는다.
씨가 문제가 아니라 땅이 문제임을 아시기에 땅의 비유를 말씀 하신 것이다.
옥토 일 때 잡초가 들어오고 가시 넝쿨이 들어오고
돌덩어리들이 들어오면 이미 옥토는 옥토가 아니다.
40년을 통해 만든 이 옥토를 하나님은 잘 간수하고 싶으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지난 고생과 아픔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오지 못하게 한다는것이다.
아간 때문에 범죄하고 가장 먼저 나타난 이스라엘의 반응이 무엇인가?
바로 여호수아부터 온다.
왜 우리를 여기에 불러서 죽이게 하십니까?라고 말한다.
리더와 하나님과 믿음에 대한 문제가 생긴다.
감사하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바로 말씀을 주셔서 믿음에 문제가 없지만
어디 교회에서는 그런가?
작은 사건들을 통해 결국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아진다.
마귀가 노리는 것은, 세상의 영이 노리는 것은 오직 이것이다.
사람들은 작은 사건으로 어디까지 가느냐면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한다.
아담을 꾀는 뱀이 한 말이 뭔가?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말했느냐?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3:1-4)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게 생각하도록 한다.
믿지 못하도록 한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모든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우리가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과의 싸움이
우리가 싸워야 할 진짜 본질이다.
사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가 문제가 아니다.
사건을 통해,
문제를 통해 믿음이 오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고
더 큰 사건이다.
마귀가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은 오직 하나다.
믿지 못하게 하는 것!
믿어도 바르게 믿지 못하게 하는 것!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다.
믿음을 주시고 믿음의 백성 만드는 것!
믿도록 하시는 것!
내가 하는 일을 통해 나에게 믿음이 오는가?
그럼 잘 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일을 할수록 믿음이 사라지는가?
내가 잘못된 길,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
비록 나에게 아픔이 있어도 그 아픔을 통해
믿음이 자란다면 그 아픔은 사건이 아니라 형통이다.
비록 나에게 힘듦이 있어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생긴다면
그 힘듦은 나에게 믿음을 주는 축복의 시간이다.
요셉에게 아픔은 형통이 되었고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는 사건을 믿음을 주는 축복이 되었다.
우리가 아픔과
힘듦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이 믿음을 가져다 준다면
그 아픔과 힘듦은 축복의 유람선이다.
결국 우리를 믿음의 보물섬으로 인도하는 유람선이 되는 것이다.
그럼 이 어려울 때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풀 수 있는가?
그 답은 성경에 있다.
첫째는 공동체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는 마음이다.
여호수아와 장로들.
리더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그들의 아픔을 내 것으로 여기고 온종일 회개하며
티끌을 무릅쓰고 저녁까지 그렇게 하였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누구의 죄인가, 누가 이런 일을 했는가 부터 찾아서
그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처단하는데 혈안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문제가 생기면 내 죄로 여기고 통회하며 자복하고 공동체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문제의 근원지를 찾으려 하지 않고
문제의 해결자를 찾아야 답이 풀린다.
문제의 해결자를 찾아야 문제의 근원지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꺼꾸로 하려 한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의 주체를 찾아 처단하려 한다.
그러면 사람도 잃고 하나님도 잃는다.
이미 아픔이 왔다.
그러면 그 아픔은 내 것으로 여기고 함께 아파하는 심정으로 그분께 가야한다.
나의 죄라고 내가 잘못해서 그렇다고 자복하고 가야한다.
우리는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아담의 피가 있어서 문제가 생기면
저 사람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저 사람을 지목하기 바쁘다.
그럼 그 사람도 잃고 나도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
답답한 심정을 하나님께 고하라.
같이 아파하고 그 아픔이 우리의 문제, 나의 죄라고 먼저 그분께 가야한다.
순서가 바뀌면 답도 바뀐다.
먼저 같이 아파하고 같이 공감하고
나의 죄임을 먼저 자복해야한다.
그때 하나님께서 위로하고 일어나라 말씀하신다.
수7:10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둘째는 다시 성결로 돌아가야 한다.
거룩함으로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어떤 놈이 그렇게 했는지 자꾸 그것을 찾으려 한다.
아니다.
하나님은 먼저 너희가 성결하라 하신다.
먼저 거룩하라 하신다.
수7:13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죽일 자를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그 잘못을 드러나게 하든지 사고로 죽게 하든지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태우든지는 하나님의 소관이다.
왜 그것을 늘 우리가 정하려 하는가?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그 사람을 어떤 징계를 내릴 것인가?
그 사람에게 어떤 처벌을 줄 것인가?
하던 지원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먼저 고민한다.
아니다.
우리가 먼저 할 일은 스스로 다시 거룩케 되는 것!
스스로 먼저 성결함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성결하지 않으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이런 일이 또다시 생긴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 난 것을 푸는 것 보다
있는 사람을 챙기는 것이 더 급한 문제이다.
문제는 문제가 날 가능성이 있었기에 생기는 것이다.
그 문제를 해결해도 다시 일어날 문제를 방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스스로 성결하지 않으면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번 사건이 나자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아이성에서 패하게 하셨다.
어떤 의미에서 패배, 좌절, 실망은 우리를 더욱 성결하고 겸손하고 낮아지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때 정말 잘 갈수 있는 기회인데
그 아픔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결국 나중에 큰 문제를 터뜨린다.
성결은 하나님의 답을 가져오게 하는 핸드폰 재 충전의 시간이다.
충전해 놓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전화기를 받아도 누릴 수 없다.
사용할 수 없다.
아무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어도
성결 없는 가나안은 충전되지 못한 핸드폰과 같다.
누리지 못하는 천국은
신랑 없는 결혼식장의 신부와 같다.
우리가 인생의 문제를 만날 때
해야 할 두 번째의 일은 성결하는 것이다.
성결이 아니고는 하나님 역사를 볼 수 없다.
마음이 청결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 임이요
셋째로 죄의 근원, 문제의 근원을 제해야 한다.
이것이 어려운 문제이다.
교회가 치리를 해야 하는가?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러나 교회를 위해서 해야 한다.
죄의 근원을 제해야 하는가?
반드시 제해야한다.
이때 우리는 두 가지 마음을 함께 가져야 한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죄를 처벌하지만 용서의 마음으로 함께 아파하고 사랑하고 용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사랑의 마지막 단계이다.
안 해본 사람은 모른다.
이런 사람을 내가 용서해야 하는가?
용서해야 한다.
그러나 죄의 대가는 공적으로 치러야 한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눈물로 회개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에게 공의와 사랑을 함께 주셨다.
공의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 모두를 기억해야 한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거룩함을 잃어버린것이 무엇인지 찾아야한다.
나의 범죄함이 무엇인지 반드시 찾아야한다.
찾아 없애지 않으면 내안에 천국은 없다.
그것이 정직하지 못함이면 자복해야한다.
그것이 돈이면 갚아야한다.
돈의 우선 순위를 내려놓아야한다.
이성문제이면 반드시 해결해야한다.
음란함의 문제이면 성결해야한다.
명예이면 포기해야한다.
인간관계이면 회복해야한다.
가만히 보면 내가 걸리는 문제는 늘 걸린다.
똑같은 문제로 3번이상 나를 범죄함의 자리에 있게 한다면
하나님의 분명한 싸인이다.
죽으라고 그것을 없애야 내 인생의 아이성이 무너진다.
한번 무너진 여리고성으로 잘 될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면 착각이다.
한번 아무너진 아이성은 내 그 범죄한것을 없앨때까지 열리지 않을 것이다.
평생 아이성 앞에서 쩔쩔 매고 살것인가?
아니면 간단하게 없애고 당당하게 살것인가? 오늘 바로 결정해야한다.
앞서 말한 세가지를 행할 때 하나님은
다시 원래의 토양으로 거룩한 공동체의 모습으로
개인의 거룩함으로 회복시키신다.
가장 좋은 것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면 좋다.
하지만 우리는 다 약한 사람인지라
누구나 그 자리에 설수 있다.
아담의 자리가 내 자리였고,
아간의 자리가 내 자리였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나였었다.
그런 심정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심정으로 나를 대하고
형제를 대해야 할 것이다.
주를 세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도 다시 사명을 주셔서 회복시키셨던 주님을 기억하자.
스데반을 돌로 쳐죽인 사도바울도 이방을 위한 그릇으로 세우셨음을 기억하자.
할 수 있다면 부인하는 자리,
핍박하는 자리에 없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자리에서 회복하려면 열 배 이상의 피눈물을 흘려야 회복할 수 있다.
좋을 때 잘하자.
그것이 지혜이다.
기도 할 수 있을 때 기도해라.
봉사 할 수 있을 때 해라.
섬길 수 있을 때 해라.
구제하고 헌금할 수 있을 때 해라.
예배 드릴 수 있을 때 기쁨으로 드려라.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려면 반드시 열배 이상의 피눈물을 흘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