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종류의 사람 (행18:12-28 )
어떤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 끼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괜한 논란과 논쟁에 끼는 것은 불편하고 불안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논란의 한 가운데 섭니다.
논쟁의 한 가운데 서고자합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자기를 증명하고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몇 명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아가야의 총독 갈리오입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난 아볼로입니다.
총독인 갈리오는 논쟁의 현장에서 도망을 갑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논쟁의 현장에 뛰어듭니다.
이유는 갈리오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이고
아볼로는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두 종류입니다.
자신을 전하는 사람이냐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냐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사는 이유,
우리가 공부를 하고 일을 하고 땀을 흘리는 이유는 복음을 빙자해서 결국
자기를 전하기 위하는 삶입니다.
아니라고 부인해 보지만 사람의 본성은 그것입니다.
자기를 온 세상에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을 때는 눈물로 기도하지만 결국 어느정도 세상적인 성과와
위치를 가진 사람의 마지막은 자기를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한 사람은 사람들과 논쟁을 싫어합니다.
갈등의 구조에 들어가기 싫어합니다.
오직 자기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아볼로는 논쟁을 찾아다닙니다.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불편도 감수하고
아픔도 감수하고
핍박도 감수하고
도망도 감수합니다.
나를 전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위해 자신의 삶을 건 사람은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 예수를 이용하는 사람과
예수를 위해 나를 드리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보통 나를 위해 기도를 이용하고 성경을 이용하고 기적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기적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합니다.
다 나를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를 알리고 싶어하는 사람은
첫째, 불편을 감수합니다.
불편을 감수하지 않는 진리는 가짜입니다.
내가 불편하지 않으면서 전하는 모든 말들은 가짜입니다.
내용이 진짜여도 내용을 담은 그릇이 가짜면 사람들은 그 내용이 가짜라 여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의 착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불편을 통해서 옵니다.
그래서 오리에 십리를 가는 불편을 감수해야합니다.
겉옷에 속옷까지 내어주는 불편을 감수해야합니다.
내 삶의 불편을 감수하지 않는 사랑은 세상은 가짜라 말합니다.
내용의 진실을 위해 그릇의 진실을 모여야합니다.
둘째, 이익의 계산을 버려야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참 계산이 빠릅니다.
맞습니다. 계산이 빨라야합니다.
그러나 주기 위해서 계산이 빨라야합니다.
가지기 위해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주기 위해서 계산해야합니다.
왜 세상이 우리를 조롱하느냐하면 빠른 계산의 결과가 나의 이익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이 계산이 빠릅니다.
그래야합니다.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빠른 계산의 결과가 자신의 이익이라면 그 사람의 말이 아무리 진실이어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진리라면,
진리를 전한다면
내가 전하는 것이 진리라면 진리에 맞는 그릇이 되어야합니다.
세상은 진리를 보기 전에 진리를 전하는 그릇을 봅니다.
성도는 목사에게 원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같은 그리스도인이지만 목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기준이 있습니다.
적어도 목사에 맞는 기준,
목사에 맞는 삶을 원합니다.
세상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도에게 원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적어도 성도가 지켜야 할 그릇이 있습니다.
나는 살지 못하지만 세상은 성도에게 성도는 목사에게 원하는 기준,
그것이 진리를 담은 그릇,
더 나은 삶을 위한 기준이 됩니다.
말씀은 진리입니다.
말씀은 빛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담은 그릇이 말씀의 진리에 맞는 그릇을 세상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한가지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좋은 그릇이 된다고 세상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이 원하는 기준이 될 수도 없고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산다고 그들이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신비입니다.
우리의 삶과 다르게 복음을 듣는 자들이 주께 돌아오는 것은 신비입니다.
그저 말씀의 방향을 향하여 자신을 드리는 것 말고는
주께서 그냥 나를 사용하시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쓰시기에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그리스도를 알리고 싶은 사람은
셋째, 나를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나를 사용하시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삶,
그것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나를 내어드리지 않는 삶은 결국 나를 높이고 나의 이름을 위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리고 싶으십니까?
진정 그것을 원하십니까?
자신을 내어드리십시오.
드리지 않으면서 채우려는 욕심을 버려야합니다.
내어 드린다는 것은
시간을 드리고
마음을 드리고
뜻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일에 시간과 마음과 몸과 물질을 드리지 않는 곳에는
결국 나를 채우려는 욕심만 남습니다.
세상에는 두가지 종류의 사람만 있습니다.
자기를 알리려는 사람,
그리스도를 알리려는 사람입니다.
지금껏 열심히 사셨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남았습니까?
남는 것이 곧 나의 방향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자기의 이름을 내려는 바벨탑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세상의 본성은 자기의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의 일은 하나님의 이름이고
그리스도인의 일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루를 살면서 그리스도를 말하십시오.
사람들을 만나면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하십시오.
혼탁한 세상에 필요한 것은 영웅이 아닙니다.
경제의 회복이 아닙니다.
세상이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예수입니다.
착각하면 안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힘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물질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 모든 물질과 시간과 건강은 결국
죄를 짓는 통로가 됩니다.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건강을
예수가 주이심을 전하는데 사용하십시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유일한 이유입니다.
* 김태형목사님입니다.
나를 참 사랑하는 제자입니다.
가난한 마음이 좋았습니다.
가난한 마음이 이뻣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하나님을 위해 눈물 흘리는 마음이 좋았습니다.
내가 어디 있든 한 걸음에 달려오는 그의 사랑하는 마음을 압니다.
평생을 가난한 마음으로 주를 사랑하고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리는
참 이쁜 사역자이기를 기도합니다.
그의 눈물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내가 그를 통해 평생 보고 싶은 변함없는 아름다움입니다.
기대하고 기대합니다.
다윗을 그 어린 시절에 부르셨던 하나님의 마음,
그 마음을 지켜가기를 기도하고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