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영광이 시작되던 날
여호수아 3:1-17
여호수아 3장은 마태복음 3장과 같은 내용이다.
이거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여호수아 3장은 신 구약의 한가운데를 기록하고 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오늘 여호수아 3장은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먼저 오늘 이야기 중에 생각해야 할 내용은
기본적으로 왜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그 기본 위에 살펴볼 것은,
첫째, 왜 언약궤가 요단강에 먼저 들어가야 하는가?
둘째, 언약궤가 들어가니 왜 요단강이 멈추었는가?
셋째, 언약궤와 백성의 거리가 이천 규빗 즉, 1km 정도 떨어져야 하는가?
넷째, 언약궤가 들어가는 것과 백성들이 성결해야 하는 상관관계가 무엇인가?
다섯째, 왜 모세를 세움 같이 동일하게 여호수아를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모세와 함께 있는것을 사람들로 알게 하시는가?
구약은 모두 상징이다.
예수그리스도 즉 새언약을 준비하는 옛언약들이란 말이다.
모두다 새언약에 대한 상징들로 구약은 설명하고 있다.
자 하나씩 살펴보자.
먼저 왜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가?
이유는 출애굽해 온 이스라엘 백성 즉 모세와 함께한 이스라엘이 첫 번째 가나안정복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모세는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이다.
물론 여호수아도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왜 요단강인가?
모세가 출애굽 해서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을 바로 들어갔다면 요단강을 건널 필요가 없다.
지리적으로 요단강을 갈 필요 없이 가데스바네아에서 바로 가나안으로 가면 된다.
그런데 그들을 가나안으로 바로 가는 것을 실패했다.
모세는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이라 했다.
그런데 그가 실패를 했으니 어떤 형태로든지 강을 건너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인도한 곳이 요단강이다.
모세의 실패
모세가 왜 실패했는가?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을 시험했고, 가나안에 들어갈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실패했다.
그럼 모세는?
역시 모세도 실패다.
모세의 실패의 원인이 뭔가?
지팡이를 두번 쳐서?
화를 내어서?
아니다.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모세 개인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있다.
'네 발에 신을 벗으라 왜냐하면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라고 하셨다.
왜 신을 벗는가?
모세는 모형이다.
거룩한 땅, 거룩한 일, 거룩한 사역을 하는 것은 거룩한 사람만 한다.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모세가 선택되었는데
다른 것은 다 부족해도 되는데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하는데 거룩의 모습을 잃어버리면
안된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하나 요구하신 것이다.
이상한 여자-구스 여자를 데리고 살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야 하는데 그것에 실패한 것이다.
[민20: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는것이 목적이었다.
모세는 그 거룩을 나타내는것에 실패해서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하실 일의 모형인데 예수님의 사역은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만 하실 수 있다.
거룩하지 않으면 십자가의 사역과 대속의 사역이 의미가 없다.
사람으로 모형을 갖추어도 사람인지라 허물이 많으나 적어도 사역적인 측면에서 거룩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만을 해야 되는 것이다.
그럼 거룩이 무엇인가?
거룩의 원 뜻은 하나님께 속한이란 뜻이다.
우리가 스스로 거룩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그분이 원하는 것을 할 때 거룩할 수 있다.
거룩한 분을 따라갈 때 우리는 거룩한 것이다.
그런데 모세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므로 하나님의 거룩에 흠을 낸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대속사역의 그림자로 실패한 것이다.
가나안은 거룩한 자만 갈수 있는데 그 거룩을 잃어버렸으니 가나안은 못 간다.
신을 벗으라는 것도 자기의 뜻대로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종으로, 종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르라는 의미로 네 신을 벗으라는 것이다.
진정한 사역은 성령께서 주시는 음성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첫 아들은 예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둘째 아들은 아니오 하고 행동으로 옮겼다.
모세는 예하고 거룩을 지키지 않은 첫째 아들이다.
여호수아에게도 동일한 명령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네가 선곳은 거룩한 땅이니'
여호수아도 예수님의 모형이다.
모세가 실패한 가나안 땅을 들어 가는 것을 선택된 여호수아를 통하여 들어가게 된다.
그때 모세에게 명령한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라는 말씀을 동일하게 한다.
거룩
가나안을 만드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예수님만이 할수 있는 일인데 모형으로 그림자로 흉내를 내는 것이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모습, 흉내, 그림자의 의미가 거룩이다.
예수님의 사역 아니 예수님 자체는 거룩이라고 말씀한다.
거룩하지 아니하면 대속의 길을 갈수 없고 죄인을 위한 대속의 사역을 할수 없다.
그래서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거룩을 요구하신 것이다.
거룩한 자가 십자가를 지실 수 있고, 그 거룩한 자를 믿는 자는 거룩하여 진다.
성경은 이 진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예수님은 거룩한 자이시다.
[요6: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구약은 거룩하신 자의 모형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 특히 모세오경을 보며 제사를 드리고 예법을 말하는 모든 곳이
다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새 언약 즉, 새로운 영적 가나안,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도성 등등으로 기록된 나라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만이 갈수 있고 길을 낼 수 있기에 구약은
그 예표로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많아서 다 기록을 할 수 없다.
그 이유를 성경은
[레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대속의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상의 옷을 거룩한 옷으로 입히고 거룩하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이 모두 그리스도 즉 거룩하신 자의 모형이다.
거룩하신 자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 모형이라는 것이다.
구약제사에서 피를 뿌림은 그 성소와 성막에서의 기구들도 뿌려서 거룩하게 되고
사람도 거룩하게 되고 거룩 거룩 거룩 전부 거룩이다.
[출28:2]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그 거룩한 자만이 속죄의 길을 가실 수 있는데
그 예표가, 그림자, 모형이 모세와 여호수아였다.
[출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거룩이란?
하나님은 신구약 성경에 거룩이라는 단어를 무려 457회를 사용하고 있다.
거룩하게 하려는 사역에 모세와 여호수아는 예수님의 모형인데 사람으로서 그나마 흉내를 내야하는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거룩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 거룩은 사람이 거룩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므로 거룩하여 짐을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딤전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라
라고 사도 바울은 기록한다.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
말씀에 속할 때 우리는 거룩하지 우리 자체가 거룩하지 않다.
구약의 제사와 율법과 모든 법들은 우리를 거룩으로 인도한다.
아니 거룩해야만 한다고 지시한다.
정말 모든 것이 거룩이다.
거룩을 빼면 구약의 제사와 이야기는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를 하나님은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이 목적이다.
거룩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본성과 거룩케 하려는 하나님의 싸움이 구약의 역사이다.
거룩하지 않으려는 우리와 거룩으로 초청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신약의 이야기이다.
불의를 행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제시하고
모형으로 주신것이 구약이고
불의한 인간을 실제 그 분 예수께서 거룩한 길을 내시며
우리를 거룩으로 초대하고 있는것이 신약이다.
[계4:8]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예수님의 사역을 미리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옛 언약 즉
이 땅의 가나안을 정복하므로 장차오실 그리스도가 새 언약 즉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을 완성하시는 이로 미리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실패한 가나안 정복을 여호수아를 통해 정복해야 하는 숙제가 남은 것이다.
이 정복이 이루어져야 영원한 영적 가나안을 이룰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 강을 건너야 하는가?
왜 출애굽한 백성은 홍해를 건넜고
그것에 실패한 백성이 다시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가?
하나님은 물에 원수가 졌는가? 왜 자꾸 강, 물을 건너게 하시는가?
일단 요간강을 건너야 하는 이유는 홍해를 건넜지만
그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세대 사람을 다 죽이고 다시 언약을 맺고 강을 건너야 한다.
그럼 강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바다와 강은 사람이 지나갈 수 없다.
사람의 능력으로 지나갈 수 없는 것이다.
영적인 가나안은 사람의 힘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을 설명한다.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다는 의미이다.
거룩한 자, 하나님 자신만이 이 길을 여실 수 있다는 의미이다.
사람으로는 갈수 없는 길을 하나님께서 길을 여신다는 의미이다.
가나안은 사람의 힘으로 갈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길을 여셔서 가게 하셔야 가는 곳이 가나안이다.
노아의 홍수 속에서 산 자
이 강을 건넌다 물을 건넌다는 의미 속에는
구약의 노아 홍수도 포함이 된다.
이미 사람은 물로 심판을 받았다.
이미 다 죽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방주를 통하여 건져내 주셨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만 물을 지나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물은 우리가 죽었던 과거를 기억하고 물을 지나야 생명이 있음을 함축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물을 완전히 마르게 하셔서 마른 땅을 지나게 하신다는 의미도
과거의 완전한 죽음과 상관없이 지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 이다.
물이 우리를 생명으로 가는 걸음을 잡을 수 없다.
강물이 가나안을 가는 걸음을 잡을 수 없듯이
영적인 가나안을 가는데 물이 우리를 잡을 수 없다는 말이다.
완전히 이전에 죽었던 우리의 모습을 지난다는 의미이다.
물을 지남은 우리의 과거가 죽었던 자였음을 고백하는 것이고,
물을 지남은 물이 이제는 우리를 간섭치 못한,
사망이 우리를 간섭지 못하는 새로운 나라로 들어갈 길이 있음을 소망하는 것이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질문을 보자.
첫째, 왜 언약궤가 요단강에 먼저 들어가야 하는가?
언약궤는 상징이다.
그 속에 있는 것은 율법의 상징인 돌비에 새긴 십계명,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를 담은 항아리이다.
이 세가지가 가진 의미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만나는 생명의 말씀, 십계명은 하나님의 말씀,
아론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선택된 제사장이라는 의미이다.
즉 예수그리스도이다.
언약궤가 물에 들어가야 한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거룩하신 자가 물을 지나 하늘 길을 여심을 상징한다.
죽음의 길을 지나,
죽음의 심판을 지나 새로운 길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영적 순례자들 앞서 언약궤가 가고 있다.
예수님께서 한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내심을 상징한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죄의 길에서 영적 가나안의 길을 내시는 자로 오실 것에 대한 예표인 것이다.
언약궤가 아니면 물이 열리지 않는다.
언약궤가 아니면 길이 열리지 않는다.
가나안의 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언약궤가 아니면 열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아니면 길이 열리지 않고
그분이 그 일을 하실 것이라는 상징, 그림자이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셨다.
3:4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죽음의 강, 대홍수로 죽은 인류가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그 길을 물을 지나 가고 계신 것이다.
살아서 가고 계신 것이다.
온 인류의 죽음을 지나 산 길을 여실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열지 못한 길을
그분 그리스도께서 여셔서 우리는 지금
그 길을 가고 있다.
걱정 말라 두려워 말라.
그분이 우리 인생의 길을 여신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우리의 인생이지만 그분이 죽음의 강을 지나 산길을 내 놓으셨으니
우리는 말씀되신 그리스도만 따르면 우리는 소망이 있다.
둘째, 언약궤가 들어가니 왜 요단강이 멈추었는가?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임을 상징한다.
늘 물이 흘러 넘치는데 사람이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것이다.
요단강은 늘 흘러 넘쳤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다시 말해 강이 멈추는 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만이 가능한 일이란 것이다.
그 언약궤가 들어가야,
하나님의 말씀이 움직일 때 세상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강이 열리고 하늘이 열림
말씀을 담고 있는 언약궤가 강에 들어갈 때 물이 멈추었다.
모세가 여호와의 지팡이를 말씀 따라 내 밀 때 홍해가 갈라졌다.
다 같은 이야기이다.
언약궤는 말씀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해 사람으로 할 수 없는 물길을,
죽음의 길을 여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예표 하는 것이다.
언약궤가 들어갈 때 가나안을 향한 새로운 길이 열렸다.
가나안의 첫길이 열린 것이다.
언약궤와 예수님의 세례받으심!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역하시기 전에 무엇을 하셨는가?
세례요한을 통하여 세례를 받으셨다.
왜?
요단강은 과거의 죽음, 노아 홍수를 통해 심판 받은 인류를 상징한다.
그 심판으로부터 길을 열어야한다.
그래서 언약궤가 들어가서 강을 건넜듯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물에 들어가셔야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이다.
과거의 죽음에서 길이 열리는 것이다.
광야에서 죽었던 자들과 함께 죽었던 우리다.
우리는 다 같은 자들이다.
우리는 죄로 죽을 인간이다.
그런 자들에게 길이 열리는 것을 상징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물에 들어가셔야 한다.
사람이 지날 수 없는 강을 언약궤가 지나가듯 예수님도
그 물속에 들어가서 나오셔야 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더 생각할 것은
구약은 육적 가나안이다.
완전하지 않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곧 죄가 차고,
싸우고 빼앗기게 될 나라이다.
불완전한 나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한 나라,
하나님의 도성,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예비하시고 그 길을 위해 오신 것이다.
그 예수님이 요단강에 들어가시자 물이 열리지 않았다.
이제는 물이 열릴 필요가 없다.
왜?
예수님은 이 땅에 나라를 완성하시러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한 나라,
빼앗기지 않을 나라를 위해 길을 여시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열렸는가?
하늘이 열렸다.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태복음은 길게 세례사건을 설명한다.
유대인을 위한 서신이니 당연하다.
하지만 마가, 누가복음은 그렇지 않지만
정확하게 하늘이 열렸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사건이기에 그렇다.
언약궤가 들어가자 강이 열렸다.
가나안의 길이 열린 것이다.
이 땅에서 가장 소망하는 가나안의 길이 열린 것이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들어가시자 '하늘이 열렸다'라고 말씀한다.
영원한 나라로 가는 길이 열리는 것을 말씀하신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영적 세계의 길이 열린 것이다.
우리가 갈수 없는 길이다.
그분만이 여실 수 있는 길이다.
그분의 상징인 십계명 돌비와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상징한
그 실체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분이 요단강을 들어가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늘길이 열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다리고 고대하던 일이 이제야 이루어져감을 보고 감탄하여
예수님을 향하여 그렇게 말씀하셨다.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그러나 아무나 그 길을 갈수 있지 않다.
그분의 피로 완전한 피 뿌림이 있어야 우리가 영원한 성막,
거룩한 지성소에 마음대로 갈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
모든 의는 하나님의 의
자 그럼 왜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세례를 거부할 때 예수님은 이렇게 해야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셨는가?
모든 의라는 것이 무슨 말인가?
모든 의는 하나님의 의다.
하나님의 의는 죄의 대가를 지불하고
공의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죄로 죽을 자들을 죽이고
다시 살리는 하나님의 의로움이다.
그것은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구약에서 그토록 제사를 통해 사하시고
죄의 대가를 반드시 치루시고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공의이다.
그것은 거저 주는 용서가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로 피로 심판하고 살길을 열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말한다.
하나님이 구약에서 수없이 반복되던 제사의 예를
단 한번에 드리는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용서되는
하나님의 의로운 방법을 말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이다.
[롬3: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세례의 의미
이제 언약궤가 들어가야 가나안을 향한 길이 열리듯
언약궤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들어갈 때 영원한 나라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는 내가 홍수 때에 인류와 함께 죽었고, 광야에서 이미 죽었고,
요단강에서 내가 죽어야 하는 자라는 고백이다.
이제는 나에게는 소망이 없고 하늘 문을 여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고백이다.
열어 놓으신 길을 가겠다는 고백이다.
이 땅에는 영원한 것이 없고 소망이 없으니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나라를 가겠다는 고백인 것이다.
이미 나는 죽고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의미이다.
나는 건널 수 없는 길을 예수님이 건너셨고,
죽은 나는 그분이 열어놓으신 길을 믿음으로 걸어간다는 고백인 것이다.
벧전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셋째, 언약궤와 백성의 거리가 이천 규빗 즉, 1km 정도 떨어져야 하는가?
이것은 십계명을 받을 때와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한 것이 아님을 보게 한다.
어떤 인위적인 방법으로 이 길을 열수 없음을 멀리서 보라는 것이다.
강을 여는 것도 십계명을 받는 것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일임을 알라는 것이다.
우리가 멀리서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멀리 떨어져야 물이 멈추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 만이 하신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되는 일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해 접근 하지 못하도록
모세의 때와 같은 원리이다.
[출20:21] 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
[출24:2]너 모세만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
오늘 이 사건은 모세와 예수님의 요단강 사역의 중간 단계인
요단강 도하가 있는 사건이다.
총 3번시도 중에 두 번째이다.
그래서 신구약의 중간에 있다고 서론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이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치밀함과
구원의 경륜이 놀라울 따름이다.
구약의 모든 사건과 이야기가 한 점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오늘의 이 사건들도 예수그리스도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넷째, 언약궤가 들어가는 것과 백성들이 성결해야 하는것과 무슨 상관인가?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여호수아 3장과 마태복음 3장은 같은 내용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일을 앞두고 하나님이 기사를 행하실 때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성결이라고 한다.
성결해야하는 이유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일을 동참하고 함께하는 유일한 일은 우리의 성결함 이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보지 못한다.
아니 함께하고 그 길을 가지 못한다.
여호수아는 오직 성결을 원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우리가 그 일을 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성결이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원인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단지 우리가 준비 되지 못하면 우리가 그 거룩하신 일에 동참하지 못하게 될 뿐이다.
모세도 하나님께서 거룩한 자로 부르셨다.
하지만 모세는 거룩함을 잃어 버렸다.
그래서 결국 모세는 가나안을 가지 못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다.
홍해가 아니면 요단강으로 돌아가게 하신다.
지팡이가 아니면 언약궤를 사용하신다.
모세가 아니면 여후수아를 세우신다.
왜 우리가 성결해야 하는가?
그건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다.
우리의 거룩함을 하나님의 함께함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자를 보는, 하나님의 일을 보고 함께하는 것은 우리가 성결할 때 보인다.
신약의 성결은 회개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세례사건이전에 세례요한은 그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회개하라'고 외쳤다.
이것은 성결이다.
성결은 회개이다.
더러운 육체와 마음을 고백하고 돌이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요단강이 열리고 하늘이 열리고 그 길에 우리가 동참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는 유일한 방법, 관문은 회개이다.
회개를 통해 성결하지 않으면 그 길에 함께 할수 없다.
성결을 지나지 않으면 언약궤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보지 못한다.
보지 못한다는 말은 내가 그 길을 가지못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신약은 회개라는 말을 천국의 시작, 구원의 길을 가는 참 믿음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요한도 회개하라 했고,
[마3:2]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막1:15]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님도 회개를 먼저 외쳤다.
[마4:17]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눅5: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회개할때 성결의 축복으로 하늘에서 잔치가 열리는 것이다.
[눅15: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15:1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제자들도 회개를 말했고
[막6:12]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영광의 자리를 옮기겠다고까지 설명한다.
[계2: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성령의 영이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회개케 하시고
그리고 우리의 삶을 그분과 동행하게 하신다.
그래서 하늘로부터의 지혜 첫번째가 무엇인가를 아는가?
'성결'이라고 한다.
약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하늘로부터 오는것이 성결이다.
회개를 통한 성결이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 하늘의 사람이 되는 첫번째 관문이다.
다섯째, 왜 여호수아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가?
왜 모세를 세움 같이 동일하게 여호수아를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모세와 함께 있듯 여호수아와 함께 있음을 사람들로 알게 하시는가?
모세 여호수아는 예수님의 상징이다.
그들은 곧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야 영광의 길을 열수 있다.
가나안을 열수 있다.
그들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일이기 때문이다.
자의로 하지 않고 아버지가 원하시고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대로이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그분의 열심을 말한다.
그 열심을 아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시는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다.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마1:23]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리더를 위하여 함께한다는 말보다 더 깊은 뜻
오늘 본문은 리더를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고 우리와 함께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의 본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초자연적 역사를 이루시며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을 행하시며
한번도 지나보지 않은 길을 가며
구약의 수많은 예표 들과 제사들과 기적과 기사가
단지 여호수아나 모세를 강하게 세우기 위한 것이면
한 사람을 세우시는 하나님 말고는 우리가 뭐라 더 할말이 있는가?
하나님은 이 함께하심,
여호수아와 함께하심으로 온 백성으로 오늘부터 시작하여 모세와 함께 한 것 같이
너와 함께함을 알게 하리라고 한 것이 단지 그들을 세우기 위함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이 집의 사환으로 다음에 할말을 위해 충성했다고 한다.
[히3:5]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임마누엘'의 참 의미
모세와 여호수아의 함께 하심은 가나안을 정복하는데 함께하신 하나님과
영원한 나라를 세우기 위한 이 땅의 큰 제사장이요,
우리를 거룩케하시는 이인 예수님과 함께하심의 예표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시자 그 이름을
'임마누엘'일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우리가 어려움을 느낄 때
아픔을 느낄 때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정도의 함께함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와
창조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온전한 장막과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준비하시고
산길을 여신 중보 되신 예수님의 모든 사역에 우리가 함께함을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후사로 그 나라를 유업으로 이을 자가 되는 것을 말하며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작정하고 예비하고 그토록 치밀하게
세밀하게 완전하게 예비하신 그 구원의 큰 역사에
라합 같은 이 죄인을 초청하시고 부르시고
영원토록 동행하시겠다는 놀라운 은혜가
'임마누엘'이라는 말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마13:35]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이 놀라운 역사를 창세부터 감추인 것이었다고 하신다.
그런데 그것을 지금 우리에게 열어주시고
그 구원이 얼마나 놀라우며
창세부터 예비하신 구원을 이런 구약의 모형들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은혜가 놀라울 따름이다.
뿐만 아니라 그 구원을 지금 우리에게 주셨고,
그 나라에 함께 상속받는 후사로 세우셔서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그 나라에 앉을 자로 불러주시는지
그 감격을 어찌 말로다 할 수 있는가?
[마25: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창세전부터 예비된 이 나라,
구약의 수많은 제사와 법과 인물과 기적들과
성경의 모든 이야기들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신령한 복을
오늘 내가 누리고
그 안에서
그 앞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서도록 함께하시는 그분의 사랑과 은혜가
이 시간 내 영혼을 감격케 하며 그분을 찬송하게 하신다.
장차올 미래의 모든 신령한 나라와
하늘의 모든 복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여!
어제도 계셨고
오늘도 계시며
영원히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거룩하신 주여!
찬송을 받으소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1: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