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 날(행14:20 - 28)
우리가 만약 어떤 사람에게 맞았든지 욕을 먹었다든지 했다면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욕 한번 먹어도 페이스북이며 트윗트며 여기 저기에 나 맞았다고 난리가 날것입니다.
그러데 바울은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사람들이 성밖에 버렸는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아무일 없다는 듯이 다시 일어나 더베에가서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 속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버렸을 만큼 심각한 상태인데 그가 그냥 유유히 일어나서
다시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습니다.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까요?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은 박해가 당연하다 생각했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22)
그가 죽도록 돌에 맞고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무슨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억울하고 답답하고 무슨 일이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환난을 받는 것은 그냥 당연하다 여겼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해 산다는 것을 무슨 부귀 영화나 세상에서 인정받고 높아지고 존경 받고 복을 엄청 받는 것으로 믿고(?)살아갑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보편화 되지 않은 복음의 초창기 모습에서는 환난과 핍박과 죽음을 무릅쓴 신앙은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목숨을 신앙이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내가 죽어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하는 사명으로 사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 일이 무조건 잘 풀리는 것을 믿음으로 믿습니다.
아닙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면 환란과 핍박은 당연합니다.
어려움을 느끼십니까?
아픔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살기가 참 힘드십니까?
당연하게 여기십시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세상은 자꾸 잘 되는 것에 우리를 주목하라고합니다.
세상은 자꾸 우리를 안전하게 예수 믿는 것을 참 복이라고 믿게 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곧 축복이다 그렇게 가르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곧 환란입니다.
세상이 다 그른 길을 가도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기 위해 세상에서 환란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내가 잘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것이 죄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나입니다.
내가 중요하고 내가 잘 되는 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그러나 참 복음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세상에서 환난을 무릅쓰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곧 세상에서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붙잡지 않고 왕관을 원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면서 면류관이 아니라 왕관을 잡으려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환난입니다.
왕관이 아니라 면류관입니다.
십자가를 지면서 환난은 당연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왜 예수님이 죽으셨는지도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예수님을 핍박했고 예수님을 미워했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사람이 이상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잘 되는 것만 붙들려하지 손해보는 길은 가지 않으려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한마디로 손해 보는 것입니다.
오리를 가자 하면 십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하며 속옷도 주고
구하면 주고, 꾸고자 하면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마5:45)
둘째로,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살고자 하는 신분의 의식입니다.
바울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음을 삶으로 증명합니다.
세상은 오리를 가자 하면 욕을 하고
겉옷을 달라하면 미쳤다 하고
원수를 위해 싸우고
박해하는 자를 같이 박해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습니다.
그 신분의 의식이 세상의 환란에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갈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분 의식과 바울이 생각하는 신분의 의식은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분 의식은 세상이 하는 대로 갚아줘야하는 의식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세상이 우리를 악하게 대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심판해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로 우리는 하나님이 선인과 악인에게 동일하게 피를 주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임을 우리가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보여주는 신분의식을 통해 우리가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오직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산상수훈은 우리를 세상에 보여주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우리도 온전하여 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이 말씀이 산산수훈 5장의 결론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세상에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의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적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원 받음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뭔가를 자꾸 보이려합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님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아들로서 삶을 통해 세상에 하나님을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나를 알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자꾸 나를 높이고 싶습니다.
그것이 덧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유혹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말씀대로 살고
기적도 행하고
능력도 행하고
탁월함도 보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보이라합니다.
나를 증명하라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목적입니다.
<나를 보이는 곳 까지>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우리의 한계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우리의 선행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가 뭔가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뭔가 자발적으로 행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신을 벗으라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가고 우리가 따른 것입니다.
공로가 없고
나의 자랑이 없고
나의 어떤 것이 없는 것이 예수를 잘 믿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보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셨습니다.
자신의 삶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만,
하나님의 성품만,
하나님의 영광만
하나님의 이름만 드러나는 완벽한 삶이 바로 예수님의 삶입니다.
우리는 자꾸 우리의 얼굴을 구합니다.
우리는 자꾸 우리의 인격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자꾸 우리의 업적을 통해 우리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합니다.
그래서 셋째는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삶의 목적은 자신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드러내는 이 세상의 가장 유일한 것이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래서 그가 붙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를 믿습니까?
구원입니까?
맞습니다.
그러면 그 구원을 통해 무엇을 드러냅니까?
왜 구원을 잃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구원을 잃은 이유는 내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받은 세가지 시험은 다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의 배,
자기 자신의 능력,
자기 자신의 영광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오늘 자신의 환난 당함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뭐 그럴수 있는 일이라고 여깁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안에서 산다는 것은 당연한 환난입니다.
그래서 곧 더베로 가서 예수를 전하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그 사람들을 제자로 삼습니다.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21)
죽었던 우리였습니다.
죽다 살아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나를 위해서 살려합니다.
언제 하나님이 함께합니까?
하나님은 영원히 함께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 때 더욱 강하게 우리와 함께 역사합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만을 위해 우리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부름은 곧 사명으로 남습니다.
부름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사명안에 거하지 않는 삶은
아픔으로
고통으로
슬픔으로 정체된 인생이 됩니다.
조금만 힘들면 온 세상이 망한 것처럼 힘들고
조금만 슬프면 온 세상이 끝난 것처럼 슬픕니다.
아닙니다.
주께서 사명이 있는 곳에 함께 하십니다.
사도들을 향한 명령과 약속은
사명을 통한 함께함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한다는 약속은
제자를 삼는 사명안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사명안에 거하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간증합니다.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27)
바울이 안디옥으로 돌아와 교회에 보고한 것은 두가지입니다
이방에서 믿음의 문을 여신 것과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환난을 당하고 이튿날 다시 복음을 들고 일어서는 이유는
사명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함께함입니다.
하나님의 함께함은 사명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이튿날 다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다시 일어나기 바랍니다.
오늘 당한 슬픔,
오늘 당한 눈물,
오늘 당한 힘듦이 우리를 오늘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튿날도 하나님은 우리의 사명 안에 함께하십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유일한 약속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신실함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붙들어야 할 약속입니다.
이튿날…
우리는 영광의 사명 가운에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존재 목적입니다.
* 몬스트로노스 교회전경입니다.
왼쪽에 사택과 오른쪽에 양철교회입니다.
앞 마당은 야채를 심으려고 땅을 고르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죽은 파니 전도사의 둘째 딸이 묻힌 지역역입니다.
장례식을 왔다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라는 마음을 주셔서
깊은 시골이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가 정착하는데 정말 많은 땀과 눈물과 수고를 지났습니다.
아직 가야 할 시간이 남았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는 줄 믿습니다.
늘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에는 형통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내야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보내야하는 눈물이 있습니다.
그 날들이 지나고 하나님의 이튿날이 되어야 그 열매는 보는 것입니다.
복음을 이루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