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신발(행11:1-18)
내가 사는 방식의 길은 나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의 기준은 나의 의로움입니다.
내가 사람을 판단하고 내가 저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이유는
적어도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나는 저 할례받지 못한 자들보다 더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하나님이 나를 위하신다는 믿음은 곧 내가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의 기준이 됩니다.
저들과 다르다는 생각,
적어도 나는 하나님이 택하신 특별하다는 생각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길의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특별함이 그들의 교만이 되고
그 특별함이 그들의 기준의 근거가 됩니다.
그 특별함의 기준의 근거가 결국 하나님의 일을 망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음이 곧 십자가에 예수를 못박았습니다.
이단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라면
자신들의 특별한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만을 택하신 특별한 구원입니다.
자신들이 깨달은 특별한 방법과 길이 아니면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만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모든 사람이 틀렸다고 말하고
결국은 하나님의 길도 틀렸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를 거부하고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까지 거부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대하고 사람을 대하는 기준의 기준이 무엇인지
겸손하게 생각해야합니다.
그 기준의기준이 내가 특별하고
나는 다르고
나는 뭔가 남다름이라고 여기는 순간 우리는
성령의 걸림돌이 되고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받았던 사람들이 됩니다.
베드로가 만약 이전의 베드로였다면 아마 그는 환상도 성령의 생각도 무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버린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가 버린 것은 의인 의식입니다.
나는 적어도 주를 버리지 않고
주님이 택한 특별한 제자,
주님이 칭찬한 탁월한 사람,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의 우편에 앉을 위대한 사람이라는
그 특별한 의인 의식을 버렸습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이 틀릴 수 있다는 자신의 기준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15장에서 이방인중 주를 믿은 자들이
모세의 율법과 할례를 다시 행해야 하는 문제가 나왔을 때
그는 성령이 주시는 생각으로 큰 다툼과 변론 중에 성령의 생각을 바르게 전합니다.
그의 기준은 자신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뜻입니다.
그 기준이 기준 되는 비결은 자신의 철저한 죄인 의식입니다.
나와 그들이 <같다>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기준의 기준>이 됩니다.
모세를 부르실 때 하나님의 첫 요구사항은 신을 벗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땅이 거룩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땅의 의미는 땅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이 거룩한 이유는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시고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 조건은 사람의 간섭,
사람의 계획,
사람의 생각으로 움직이지 않는 곳입니다.
그 땅으로 모세가 초대 받은 조건은 발의 신을 벗는 것입니다.
그 발의 신의 의미는
<생각의 신발>입니다.
생각의 신발은 곧 우리의 기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운 우리의 기준입니다.
그 기준의 한 가운데 내가 의인의식,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는 의인의식,
그리고 내 인생을 내 뜻대로 해보려는 주인의 식이
<내 생각의 신발>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으로부터 얻는 것은 성령이지만
그가 행한 것은 생각의 신발을 벗은 것입니다.
주를 부인하고
처절한 좌절과 절망 가운데 그가 버린 것은
그의 인생을 잡고 있던
실패하게 하고 좌절하게 하던 자신의 생각의 신발입니다.
모세가 실패한 것은 그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가 생각의 신발을 벗지 못해서입니다.
그가 거룩한 땅에서 행한 것은 자시의 생각의 신발을 벗은 것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오직 발에 신을 벗으라고 한 것 말고는
그 자신에게 요구한 것이 없습니다.
신발의 신,
즉 생각의 신발을 벗지 않으면
바로에게도 가지 못합니다.
그가 생각의 신발을 벗지 않자
천사가 길의 숙소에서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평생을 이 벗지 못한 생각의 신발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는데
하나님이 유일하게 요구하신 것이 발의 신
즉 생각의 신발을 벗는 것인데
하나님이 나타나 기적을 보이고 길을 보이고
뜻을 보여도 그가 그 생각의 신발을 벗지 않자
하나님은 그를 죽이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구사일생 산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언약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우리는 자꾸 우리의 의로움,
우리의 특별함,
우리의 남다름으로 자꾸 기준을 삼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준에 함께한 모든 사람이 숨을 쉬지 못합니다.
아파합니다.
죽어갑니다.
영혼이 말라가고 영혼이 신음을 해도
오직 내가 세운 기준이 영혼보다 교회보다 하나님의 뜻보다 우선입니다.
생각의 신발,
기준의 기준을 버려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모세처럼 죽을 위기에 놓이게 되고
성령 받지 못한 베드로처럼 혈기만 왕성한 사람이 되고
성령의 큰 일하심에 아픔이 됩니다.
일하려 하지 마십시오.
일보다 기준의 기준을 바꾸려 하십시오.
그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내 생각의 신발을 벗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생각의 신발을 벗지 않으면
나를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인도자의 자리
중보자의 자리에 서지 못하게 하십니다.
인생도,
교회도
하나님의 큰 구원도
하나님이 이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광야에서 구름기둥 불기둥이 인도할 때
따르는 훈련만 필요합니다.
가나안을 위한 준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면 사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죽어라 훈련한 그것 한가지.
가자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준의 기준이고
생각의 신발을 벗는 것입니다.
벗지도 않고 자꾸 신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 싸워야 한다고
적이 강하니 더 끼워 입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맥을 쌓으려 하고
학위를 쌓으려 하고
스킬을 copy 하려합니다.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생각의 신을 벗지 못한 사람,
기준의 기준을 바르게 갖지 못한 사람은
어김 없이
주를 만나기 전 모세가 되고
주를 부인하던 베드로가 되고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이 됩니다.
그것이 얼만 무서운지 모릅니다.
아니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세월만 가는 것입니다.
스킬을 배우는 것보다
인맥과 프로그램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 생각의 신발을 벗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나를 관통하고
성령이 나를 이끄는 체험이 없이 사용하는 모든 스킬은
결국 모세처럼 사울처럼 베드로처럼 상처를 입히고 사람을 죽이는 존재가 됩니다.
그것이 성경의 인물을 통하여 우리가 알아야 하는 지식의 전부입니다.
낮고 천하게 오신 그리스도를 기억해야합니다.
나의 의인 의식을 깨뜨리기 위해서
의인 의식 속에는 복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말 구유에서 나시고
죄인들과 함께 거하시고
약한 자들,
세상의 기준으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과 함께 거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삶과 모습을 우리는 일부러 외면합니다.
이유는 내가 의인으로 선택함을 받았음을 기억하고 싶어합니다.
죄인으로 시작하지만
의인의식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생각의 신발을 벗지 않는 삶에는
더 이상 성령의 일하심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아니 더 많은 잡음을 일으키고
더 많은 상처를 주고
더 많은 문제를 낳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진 의인 의식에 한 몫 하는
경력과
세상적 지위와
지나온 세월의 업적을 만들려고 죽어라 복을 바라는 것입니다.
잘 못된 기준의 기준,
생각의 신발을 가진 자는
사람을 더 많이 아프고 힘들고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그 기준이 사람을 아프게 할 뿐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도 얼마나 많은 생각의 신발을 벗지 않고 살았는지
잘못된 기준의 기준을 가지고 살았는지 무섭기까지합니다.
가장 상처를 많이 받는 사람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입니다.
함께한 가족,
함께한 사역자들,
함께 지내는 공동체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수 없는
기준의 칼을 휘둘러 수 없는 상처와 피를 흘리게 하면서
자신의 의인 의식,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나는 특별하고
나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태연하게 살아갑니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아픔입니다.
저 또한 이것에 예외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마 지금까지 여기 광야에서 홀로 있는지 모릅니다.
생각의 신발을 벗는 훈련,
기준의 기준을 바꾸는 훈련을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와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가장 위대한 사람은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나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믿습니다.
베드로는 오늘 자신을 알던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에게 일하신 하나님을 증거하지만
실은 자신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변한 자신의 기준과 생각의 생각으로
사람들은 베드로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의 기준은 변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의 신발을 벗지 않으면서
하는 어떤 말도 행위도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까운 사람이 먼저 나의 변화된 기준과 생각의 신발을 알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입니다.
땅끝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변한 나의 기준과 생각의 신발을 벗은 이후입니다.
그 변한 나의 기준과 생각의 신발을 벗음으로 성령은 세상을 향하여
그분의 복음을 확장시켜 나가십니다.
기준의 기준을 바꾸고
생각의 신발을 벗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진심으로 구해야 할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