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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이 변한 이유

사울이 변한 이유

 

 

 

 

 

 

 

 

 

 

 

 

 

 

 사울이 변한 이유(9:1-9)

 

 

사도 바울의 인생의 변화의 핵심은

<만남>입니다.

 

 

예수 믿는 자를 죽이고 핍박하고 감옥에 잡아가던 자가

하루 아침에 복음을 전하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20)

 

 

<즉시>입니다.

 

 

그가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다 하루 아침에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유는 한가지 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머리로 배웁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오직 만남에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설명해도 안됩니다.

그냥 한번 만나면 됩니다.

성령이 한번 만나 주시면 됩니다.

그것이 다입니다.

 

 

 

누가 증인이 됩니까?

누가 복음의 증거자가 됩니까?

누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게 됩니까?

 

 

<만난 >입니다.

 

눈이 안보이던

먹지 못하던

 병이든

그것이 죽음과 같이 어두운 절망이든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 성령 안에서 주를 만난 사람입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전부를 거는 사람이 됩니다.

어제 까지만 해도 죽이던 자가

이제는 죽음을 당하는 위치에 섰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23)

 

 

자신이 믿고 신봉하고 따르던 모든 이론과

논리와 종교를 버릴 있는 이유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한번의 만남으로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 안에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경험하고

예수님을 알게 것입니다.

 

 

한번이라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은

떠날 없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모습으로

나의 모든 죄를 사하시며 용납하시는 주님을 만난 사람은

결코 주님을 떠나지 못합니다.

 

 

경험이 한번이어도

영혼의 체험과

육체의 경험은 놀라워서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전부를 걸어도 왕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그렇게 만났습니다.

그것이 사울이 바울되는 핵심입니다.

 

 

<만남>

우리를 그렇게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만남이 어떻게 찾아옵니까?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첫째, 빛으로 찾아옵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3)

 

 

주님이 찾아 오시면 어김 없이 빛이 안에 비추입니다.

그것이 가시적 빛이든

눈에 보이지 않고 영적으로 느끼는 영적인 빛이든

분명하게 느끼는 밝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전에 없던 환해짐을 인생으로 느끼게 됩니다.

안에 어둠이 물러가고 빛으로 모든 죄를 비추며

회개와 자백과 함께 죄를 인식하게 됩니다.

 

 

빛의 기능은 어둠을 밝히고 어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찾아오시면 빛이 찾아오지만

나에게 적용되는 기능은

죄를 깨달음입니다.

빛이 왔는데

예수를 믿었는데 나의 죄인됨,

나의 더러움,

나의 악함을 고백하지 않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빛을 경험한 사람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나를 찾아오시면 모든 죄가 깨달아지고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사울이 빛이 한번 비치고 지나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그리고 바로 복음을 전할 있는 사람이 것은

그가 주님을 만나기도 했지만

그의 죄인됨을 스스로 가운데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철저히 깨닫지 못하는 자는

결코 빛을 받아 들이지 못합니다.

 

 

스데반을 죽이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스데반을 통해서 빛을 보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울은 빛을 봄으로 자신의 죄인됨을 철저히 발견한 것입니다.

 

 

 

둘째, 소리로 찾아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4)

 

 

어제도 말씀을 드렸지만 성령이 오시면

명확하게 나를 부르신 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나를 향한 음성 속에

내가 인식하는 명확한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소리,

정확하게 나를 부르시는 소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던 주님이

야곱을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시고

여호수아를 부르시듯

본인이 인식하는 소리로 찾아오십니다.

 

 

성령은 안에서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음성은 명확한 소리이고

영혼과 마음이 깨닫는 음성으로 인식할 있습니다.

 

 

그래서 소리에 반응하게 됩니다.

이상합니다.

사람들은 어디서 소리가 들렸는지 알지 못합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7)

 

 

그러나 이름이 불리워진 당사자는 명확하게 소리를 알아 듣습니다.

그래서 소리에 반응하고 소리에 대답합니다.

이것은 자연적 일이 아니어도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인격적으로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성령을 통해 말씀으로 인격적 대화를 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대화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성도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대화하기 원하시고

모든 대화 속에 소리로 찾아오십니다.

 

 

 

셋째,  육체적  체험으로 옵니다.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9)

 

 

하나님은 우리를 급하게 사용하실 때는,

강하게 만드실 때는 반드시 육체의 훈련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것이 눈을 보지 못하게 된다든지

아니면 다른 어떤 육체적 장애를 통해 회복되는 체험을 하게 하십니다.

사울이 가장 믿었던 한가지는 바로 자신의 ,

자신이 보는 것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가장 믿고 있는 것을 꺾으심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사울의 배울 만큼 배운 지식과 그의 학식과

그의 가문의 탁월함을 꺾는 사울의 핵심은 바로

<>입니다.

 

 

아무리 전부를 가져도 눈을 뜨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면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사울이 인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를 찾아가실 그의 눈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것이 사울이 주님에게 집중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셔야 하는데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있다면

내가 주님께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있다면

일단 그것부터 없애버립니다.

 

 

사역자에게는 돈입니다.

하나님 말고 사역자가 믿는 것은 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줄을 끊어버리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바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보다 자기를 의지합니다.

 

 

아브라함에게 가족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가족에 대한 집착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찾아온 시험이 아내이고

그리고 마지막 시험이 아들 이삭입니다.

 

 

모세에게는 무엇일까요?

그의 위치입니다.

그의 왕자라는 위치와 왕궁이라는 위치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없애고 모세를 다시 부릅니다.

 

 

 

여호수아는 무엇일까요?

모세입니다.

그가 가장 육체적으로 의지하고

육체적으로 주님께 걸림이 되는 것은

모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 이후에 그를 가나안 정복에 사용하십니다.

 

 

사울은 지금 그가 의지하던 모든 것을 한번에 끊어내는 것으로

눈이 사용되어졌음을 알아야합니다.

육체의 모든 희망을 끊는 한가지,

눈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사용되어지기 위해서

남들이 알지 못하는 육체를 의지하는 한가지를 버려야합니다. 

그것을 버려야 주님만 붙들게 됩니다.

주님이 주님되어야 하는데 걸림이 되는 한가지

한가지를 내려놓을 자유로운 사람이 됩니다.

 

 

평생 이것에 매여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을 봅니다.

신앙도 좋아 보이고

주님을 위해 헌신도 같은데 하지 못하는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한가지에 걸려서 주님께 쓰임 받지 못함을 봅니다.

 

육체의 걸림돌을 내려야합니다.

 

 

문제는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육체를 너무 의지하기도 하짐나

육체의 약함에 너무 빠져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드온입니다.

여호수아입니다.

사람의 공통점은 너무 약한 자존감과 너무 어려워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육체의 강함이 걸림이 되기도 하지만

너무 약한 자존감과 너무 약한 자기비하

그리고 너무 낮은 정체성이 주님께 나아가는 걸림이 되기도합니다.

 

 

베드로는 너무 강한 자기 정체성과 자존감 이었지만

실패를 통해 낮은 자존감으로 있을 주님께서

그것을 회복시켜 주심으로

다시 만나주심으로 회복되는 모습을 봅니다.

 

 

너무 강하게 자신의 육체를 의지하는 것과 같이
너무
낮은 자존감도 육체적 걸림돌이 됩니다.

모든 회복되고 내려 놓아야 하는 육체의 걸림돌입니다.

 

 

 

 

넷째, 먼저 주님을 만난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통해 사울에게 보냅니다.

이미 주님을 만난 사람을 통해 성령은 역사합니다.

그래서 그는 겸손을 배우게 되고

섬김을 배우게 되고

주님을 배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가정의 부모님을 통해서 배우고

교회와 신앙을 먼저 주님을 아는 사람을 통해서 배웁니다.

그래서 사람의 신앙의 색깔은 사람을 주님께 이끈 사람의

색깔과 거의 흡사하게 됩니다.

 

 

교회는 먼저 성령을 경험하고

성령 안에 있고

복음을 먼저 자를 통해 성령을 알고 배우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아직 신앙 안에 바르게 세워지지 않았다면

분명히 사람 주위에 성령으로 인도하는 사람이 없음을 봅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귀한 성도 옆에는 귀한 성도가 연결되고  세워짐을 봅니다.

 

 

성령은 그렇게 성령 안에 있는 먼저 사람을 통해서 찾아옵니다.

 

 

사울이 바울 되는 핵심은 만남입니다.

주님이 그를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남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목적이 사람을 만듭니다.

어떤 목적으로 세워졌는지가 사람을 만듭니다.

 

 

목적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냥 주님이 부르시는 목적에 맞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모든 이를 거룩한 목적으로 부르셔서 그분이

거룩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은

<만남>입니다. 

 

 

만남이 없는 거룩함은 없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사용됨은 없습니다.

 

 

 

당신은 언제 주님을 만난 것이 마지막입니까?

 

 

겨우 의무 방어로 삶을 영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도니까

집사니까

장로니까

권사니까

목사니까

선교사니까

그냥 의무 방어로 겨우 살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만남으로 안에 충만하게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증인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목숨을 걸고 세상에서 주를 붙들지 못합니다.

 

 

만남!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유일한 길입니다.

모든 주님과의 만남 속에는 목적,

주님의 뜻을 이루는 거룩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만남은 날마다 기대가 됩니다.

인생을 바꾸는 놀라운 .

성령 안에서 <만남>입니다.

 

 

 

 * 저희 선교지 사역자들입니다.

저희 사역자들은 이미 목사가 되어서 들어오는 사역자가 없습니다.

신학교를 들어가기 전부터 훈련을 받고 헌신해서 신학교를 가게됩니다.

그리고 훈련을 받고 공부를 하면서 목회 훈련을 받습니다.

교회 개척을 함께 하면서 사역자로서의 모든 것을 배웁니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걸립니다.

하지만 가장 확실하고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 여겨

동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세우고 훈련하고 제자로서 목회자로 세우는 것이

인내의 시간이 걸리고 피를 말리는 씨름을 해야합니다.

주께서 복을 주셔서 많은 사역자들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지난번 사역자 미팅 사진입니다.

이십 여명의 사역자들이 주님을 날마다 만남으로 복음을 위해

생명을 드리는 귀한 사도 바울과 같은 사역자들이 되기를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