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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하여 보라

주목하여 보라

 

 

 

 

 

 

 

 

 

 

 

 

 

 

 

 

주목하여 보라 (3:1-26)

 

십자가의 반대말은 <> 했습니다.

믿음의 반대말은  의심이 되기도 하지만

실은 <자기 사랑>, <자기애>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믿음의 반대를 <무지>라고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17)

 

 

믿음이 오는 통로는 앎입니다. 예수를 바르게 바른 믿음이 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기회가 때마다 복음, 바른 복음을 전합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제대로 알고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에 대해 바르게 안다면

세상이 무서울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증인이라 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아는 것입니다.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한마디로 증인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증인까지가 예수님을 안다는 ,  복음을 바르게 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것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증인으로 세워질 때입니다.

우리의 훈련과, 우리의 배움과, 우리의 수고는 증인까지 가야합니다.

 

 

증인이 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을 안다 없습니다.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자기 삶에 열심을 다하는 사람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들의 열심은 당할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없는 것은 예수에 대한 지식과 증인으로서의 삶입니다.

 

 

훈련은 실전 투입이 이루어져야 훈련의 가치를 발휘합니다.

제자들의 힘은 증인이 것입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아는 것이 많아도,

성경을 어릴 적부터 배우고 예배를 수없이 드리고 수련회를 빠지지 않고 가져도

증인이 되지 못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아픔입니다.

 

 

증인이 되게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이 오셔야만 하는 이유는 성령이 오셔야 증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증인은 것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하게 하시는 이는 성령입니다.

내가 말하지만 말이 사람의 영혼을 움직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성령은 증인으로 세우는 힘입니다.

 

 

다른 것은 합니다.

봉사도 하고 공부도 할만큼 하고 기도도 잘하고

설교도 잘합니다. 아는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증인의 삶은 안합니다.

그것이 기독교가 힘이 없어지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힘은 증인의 삶의 현장에서 나옵니다.

증인이 전하는 복음의 지식이 전해지는 현장에서 나타납니다.

입을 열어 전해야 하는 증인의 삶이

입을 열지 않고 삶으로 말하지 않는 삶이 되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내가 하려니 힘이 없습니다.

성령의 이끄심 안에 있어야 그것이 가능한데

성령의 이끄심 안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먼저 움직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일하실 틈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증인의 삶이 아니라 그냥 교훈이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

 

 

믿음의 반대말은 자기애, 자기 사랑이라 했습니다.

믿음의 걸림돌은 결국 자기를 세우는 것입니다.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아담의 실패의 원인은 믿음의 상실입니다.

 

 

증인의 삶은 끝까지 자기를 세우지 않습니다.

자기애에 빠지지 않습니다.

자기를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자기 사랑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바뀐 것은 자기 사랑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으로 변화 것입니다.

예수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삶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자기애입니다.

믿음은 오직 주를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내가 가는 마다 사람이 세워지는 것이 믿음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내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이 세워지는 역사 그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내가 믿음이 있다면 내가 세워집니다.

내가 믿음이 있다면 나로 인해 사람이 세워집니다.

흔들리지 않는 감격으로

어제와 다른 감격으로 사람이 세워지는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반대로 가면 내가 세워집니다.

것은 채워집니다.

그러나 사람은 세워지지 않습니다.

자기애에 빠지면 나는 좋은데 나로 인해 사람이 세워지는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것은 다른 사람을 세우는 기쁨입니다.

 

 

베드로는 오늘 자기애를 버림으로,

자기 사랑을 포기하므로

걷지 못하던 영혼을 자유케하고 그리스도의 용사로 세웁니다.

그것이 자기애를 포기한 사람의 얼굴입니다.

 

 

나로 인해 세워진 사람.

사람이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심판의 기준입니다.

 

 

작은 소자에게 것이 나에게 것이라는 것은

나로 인해 영혼들이 얻은 기쁨의 열매로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가는 마다 영혼이 살아나는,

자유를 얻는,

회복을 누리는 사람이 열매로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궁극적 일은 나를 통해 사람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남지 않는 장사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장사입니다.

베드로를 회복시키시고

제자들을 다시 부르신 주님의 명령은

" 양을 치고 먹이는 " 입니다.

 

 

표시 나지 않지만

여러분 앞에 세워야 영혼이 있습니까?

그것이 소명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수년 동안,

아니 년을 기도하며 기다리는 영적인 앉은뱅이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령 안에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께서 주목하여 보시는 이유입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4)

 

하루를 사며,

사람을 만나며

공부하며 직장을 다니며

무엇에 주목하십니까?

주목하는 것이 나의 본질을 표현합니다.

 

 

성령의 번째 일은 주목하여 보는 것입니다.

내가 보려 하지 마십시오.

성령이 주목하여 보시는 것을 보려 하십시오.

내가 본다면 망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주목하여 보신다면 영혼을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성령은 결코 스스로 일하지 않습니다.

나를 통하여 영적인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령의 사명은 나를 <통하여>입니다.

 

 

믿음은 <나를 통하여>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내가>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시도록

나를 향한 자기애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베드로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입니다.

 

 

앉은뱅이를 주목하지 마십시오.

베드로를 주목하십시오.

성령께서 어떻게 베드로를 사용 하시나를 보십시오.

성령이 주목하시는 것에 주목하는 베드로입니다.

그것이 성령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훈련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목하시는 것을 주목하여 보는 훈련입니다.

그것이 사명의 시작입니다.

 

 

"주목하여"

 

놀라운 세움의 시작이자

성령이 일하시는  걸음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