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와 나 그리고 천국
여호수아1:1-9
내 존재의 완성은 오직 공동체를 통해서 온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훈련시키고 다듬으시는가?
일차적으로 완성된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람이다.
베드로는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로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라고 사도바울은 말한다.
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장성한 우리가 이 땅을 사는 이유이다.
이 모습으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 천국에서 잔치가 벌어지는 것이다.
잃어버렸던 아담과 하와의 옛모습으로 자란 우리는
천국에서 기뻐할 충분한 이유이다.
그리고 둘째는 이 땅에서 개인의 영적 자람은 반드시 공동체를 위해
존재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존재의 완성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 말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왠지 조금 멀게 느껴진다.
실제적인 표현은 내가 속한 나의 공동체의 유익과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이다.
여호수아는 오늘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부름 앞에 선다.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수1:1)
이 말속에서 개인의 부름은 곧 성숙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성숙이다. 개인의 성숙을 반드시 포함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신실하신 일하심을 통하여
나를 반드시 거룩한 모습으로 세워가신다.
그리고 그 성장과 성숙은 공동체를 향하게 만든다.
물론 하나님은 각 개인의 성숙만으로 충분히 기뻐하시나 (에녹)
그분은 우리의 준비는 반드시 속한 공동체에게 돌려지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이 땅을 살 때 예수를 믿고 천국을 보장받은 후 바로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죽이지 않으시는 이유 두 가지이다.
이미 개인의 영적 성숙과 신앙의 성장에 대해서는
관점의 변화,
가치의 변화,
믿음의 변화,
그리고 체질의 변화로 4편에 거쳐 생각을 해보았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개인으로서 자라고 성장하는 모습이라 했다.
그러면 이렇게 만든 하나님께서 무엇에 쓰시려고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그 광야의 시간,
아픔의 시간,
고통의 시간을 지나게 하시는가?
이유는 단 하나다.
공동체를 섬기고 세우기 위함이다.
나의 존재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아신다.
그분의 모습 앞에 나는 가치 있는 거룩한 나라로, 구별된 백성으로, 존재론적 나로
하나님은 받으시지만,
그 가치는 발휘와 증명은 공동체 속에서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 빛이니'
세상속에 있을때 우리는 빛을 증명된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우리가 빛으로 공동체 속에서 우리의 선을 증명해 낼때 가능하다.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우리가 빛의 모습으로 증명해 내는 현장이 공동체 속이다.
하나님에 의해 준비된 나는 공동체 속에서 그 힘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빚으심이 드러난다.
얼마나 일하셨고 얼마나 공을 들여 광야를 통과했는지
공동체 속에서의 내 모습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드러나길 원하신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일하지 않으시고
나를 통해서만 그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세상에, 공동체 속에, 나의 친구에게, 내 가족,
아내와 남편,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에게 보여주길 원하신다.
모든 성숙의 시작은 눈이라 했다.
관점의 변화라 했다.
여호수아는 지금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광야의 정탐꾼으로 보내셨고,
모세 옆에서 40년의 시간을 뼈아픈 훈련을 지내게 하셨는지
오늘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왜 하나님께서 그 수많은 기적을 통하여,
수많은 설교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통하여
이 시간의 내가 있도록 하셨는지 여호수아를 시작하는 이 시간
'여호와께서 일러 가라사대'라는 음성 속에 있음을 알기 원하신다.
'홀로'는 '함께'를 위하여 존재한다.
아울러 '함께'는 각 '홀로'를 통하여 완성되어진다.
각 홀로들의 광야가 그래서 힘겹지만 아름다운 이유이다.
어떤 목사님은 '함께'가 흔들릴 때 다시금 각 개인의 '홀로'를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신다는 말씀을 들었다.
그것이 정확하다.
이스라엘의 광야는 오직 '함께'앞에 그 가치를 증명 받게 된다.
우리 각 '홀로'는 오직 '함께' 라는 단어 앞에 그 가치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와 나라는 이 제목 앞에 많은 생각과 함께
단순한 결론을 내야 한다.
지난 수많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내 인생의 과정은
오직 공동체를 위한 준비였다.
나의 가치는 공동체를 통하여 드러난다.
모세의 가치는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 앞에, 속에 있을 때 그 가치가 드러났다.
아브라함의 가치는 믿음의 조상이라는 민족 앞에 가치가 있다.
요셉은 이스라엘 가족 공동체 70명이 안전하게 정착되고 거주 할 때
그 가치가 드러나고 그것을 통해 민족 이스라엘의 형성이
200만으로 이루게 된다.
여호수아가 오늘 지난 40년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과거의 자신의 수많은 일들을 떠올리며
함께 갔던 열 두 정탐군과 40년간 그들의 죄로 죽어갔던 광야의 장정들을 기억하고,
모세 옆에서 혹독하게 훈련을 받았던 그 수많은 눈물들이 기억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오늘 하나님의 이 부르심 앞에
나의 존재는 오직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하여 존재함을 결론 낼 것이다.
이스라엘이 없는 나는 하나님께서 살려두실 필요가 없었음을 생각했을 것이다.
모세는 그래서 눈에 보이는 적들의 강함 앞에 강하고 담대 하라는 말씀으로 위로하고
하나님 또한 오늘 여호수아를 향하여
강하고 담대 하라는 말씀을 통하여
네 자신의 담대함은, 강해짐은
오직 이 민족 공동체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존재함을 느꼈을 것이다.
여호수아가 시작하는 이 시점에 그는 그 하나님의 깊은 음성을 들은 것이다.
왜 내가 존재하는지?
왜 나에게 광야가 필요했었는지?
왜 내가 지금 이 시간 서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는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눈이 뜨인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기적과 경험해 보지 않았던 축복이
모두 이 공동체를 위함이었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그 땅으로 가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밟는 곳을 다 줄 것이다. 이 민족에게 주기로 한 땅을 줄것이다.'(신1:4-5)
그리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다시 너에게 말하고 힘을 준다.
'너를 능히 당할자 없으리니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고 함께 하겠다'(신1:5)
이 사명 앞에 여호수아는 나와 공동체라는 단어앞에 머리를 숙였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의 존재됨은 오직 공동체로 드러난다.
그래서 그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 명령이다.
둘은 공동체에 대해서
둘은 자신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하나는 나와 공동체를 위해서이다.
먼저, 자신을 위한 말씀이다.
좌우로 흔들리지 않는것이다.
사람은 실수 한다.
그래서 공동체를 위한 이 마음을 흔들리면 안 된다고 명령하신다.
모세가 흔들렸던 적이 있다.
반석을 두번 칠때다.
그런데 사실은 그전에 이미 흔들렸다.
구스 여자를 취할때부터 이다.
그 후에 모세는 마음이 흔들려 자신에게 마음이 집중되는 순간
공동체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실수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왜 우리가 거룩한 땅으로 가지 못하는가?
내가 공동체보다 앞 설 때이다.
내가 없어지고 공동체가 나의 목적, 나의 존재 이유가 될 때 우리는 가나안으로 서게 된다.
7장에 가보면 아간이 나온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가 공동체적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개인욕심에 빠졌을 때,
마음이 흔들려 한쪽으로 치우칠 때 온 공동체는 박살이 났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향하여 이 마음, 좌로 우로 치우침을 경계하신 것이다.
나와 공동체의 중간에서 그 균형을 잘 조절해야 함을 일찍 말씀하신 것이다.
신약에서
크게 마음이 흔들린 사람이 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이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세워질 때 그들은 자신의 마음과 소유가
공동체의 방향과 일치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결코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아간의 사건과 동일한 것이다.
우리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할 때,
우리는 단지 죄를 짓지 않는다,
유혹에 빠진다,
등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이제 이 공동체와 나를 생각할 때 죄란
공동체에 힘을 빼는 것,
공동체에 아픔을 주는 것,
공동체에 나로 인해 슬픔을 주는 것이 모두 포함된다.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흔들리면 공동체는 망한다.
모세가 흔들릴 때 자신은 그 소망하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여호수아가 흔들리면 공동체는 진짜 망한다.
내가 흔들리면 나도 못 들어 가고 공동체도 못 들어 간다.
그래서 하나님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면 내가 좌우로 흔들리지 않을때 주시는 복이 뭔가?
형통함이다.
그렇게 바라고 소망하는 것!
형통함!
우리 인생의 형통함이 어디서 오는가?
하나님께서 마음을 두고 계시는 사람,
공동체를 위해 내가 좌우로 흔들림 없이 서있는 것이
바로 형통함이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공동체보다 나를 먼저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를 주셨다.
내 아픈 과거를 결코 잊지 말라.
하나님은 공동체를 위해 나를 존재케 하신다.
내가 나보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관점, 가치,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다.
그때 형통함은 따라온다.
요셉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므로 형통함이 있었다.
요셉은 축복받을 근거가 하나님이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그에게 유일한 형통함의 근거를 찾으라고 하면
그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사람들을 위해 살았다.
어떤 사람은 요셉을 꿈을 잡고 왔다고 하는데 거짓말이다.
요셉은 형들을 마지막에볼때 그때야 꿈이 생각났다 했다.
다른것이 많이 있지만 일단 한가지만 보면
요셉이 왜 형들에게 팔려갔나?
아버지의 심부름이다.
그는 다른 사람의 부탁,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는 것에는 지지 않았다.
그런 그가 마지막에 고백이 뭔가?
'이렇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생명을 위하여 나를 먼저 보내셨다'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려고 했다'(창45:5-7)라고 고백한다.
이런 고백은 하루 아침에 나오는 고백이 아니다.
요셉은 어릴 적부터 적어도 사람들을 위한 관점, 가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통을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가 가는 곳 마다 성실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우리자신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가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관점을 가질 때
우리는 형통함의 축복을 누릴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자신을 위한 말씀 두번째는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다.
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고 하신다.
우리의 입에 나의 말이 있게 하는 순간 우리는 길을 잃는다.
왜 늘 우리는 나의 생각, 나의 말을 하는지 모른다.
스스로 돌이키고 반성도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스스로 말씀을 늘 입에서 떠나지 않고
읽고 묵상 하는 것 밖에 없다.
그래야 스스로를 지킨다.
사람들 앞에 선 사람들의 실수 중 가장 많은 것은 말의 방종이다.
말이 많아지면 실수가 많다 했다.
내 생각, 내 마음을 조절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유일한 길은
광야, 아픔이든지 그것이 아니면 말씀 밖에 없다.
읽고, 읽고, 외우고, 외우고, 암송해야 한다. 묵상해야 한다.
말씀이 내 안에 있을 때 평탄의 축복을 얻는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인생의 길에 지도도 없이 인도자도 없이 가는 것은
반드시 길을 잃게 된다.
그 인생의 길,
가나안의 길에 유일한 안내자,
가이드는 말씀 밖에 없다.
말씀 안에 있을 때 나도 모르게 바른길을 결정하게 된다.
나도 모르게 말씀이 내속에 뜨거우면 내가 판단하는 것 같지만,
내가 결정하는 것 같지만 가보면 그 길이 맞았음을 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이 내 안에 없을 때 한 결정은
후회할 일이 생긴다.
말씀이 내 안에 충만하지 않을 때 한 결정은 반드시 돌이켜야 하는 일이 생긴다.
말씀을 두라.
내 안에 두고 입에서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라.
그러면 세상의 이치와 길이 보인다.
아는 사람은 안다.
왜 랍비들이 세상의 지혜에 대해 스승들인지!
그 지혜가 말씀 속에 있을 때 아니 말씀이 나를 이끌어 갈 때(이 말을 알려나^^)
나를 평탄케 되고, 형통함의 복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둘은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강하고 담대하라.
눈에 보이는 적에 대해서 싸워야 하는 여호수아에게
강한 모습 담대한 모습이 필요하다.
이것은 나 스스로에게도 필요하지만
나를 믿고 따르는 공동체에게도 필요하다.
앞서 가는 사람이 이 길인가? 저 길인가? 갈등할 때 싸우기도 전에 내부 분열이다.
앞서 두 개를 지키면 이것이 온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마음이다.
하나님 나를 부르셨다라는 확신이 오면 적들 앞에서 강하고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나를 위함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함이다.
그래서 백성들이 우리가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다 따르겠다 죽기까지 하겠다 해놓고
마지막 말이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1:18)
라고 결론 짓는다.
때로는 나의 약함에 대해, 부족함에 대해 솔직해지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
그래서 약함을 함께 나누고 공유해서 같이 세워져 가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싸워야 하는 문제, 영적 전쟁에서의 문제,
방향성의 문제, 비전에 관함 문제에 대해서 우왕좌왕한다면
공동체는 파멸된다.
리더가 공동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선물은
가고자 하는 방향에 대한 담대함과 강함이다.
공동체가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이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말씀이 떨어지면 남은 것은 지키는 것이다.
말씀은 지킬 때 능력이 나타난다.
능력을 위해서 말씀이 온다.
능력 없는 지식을 위한 설교나 말씀은 의미가 없다.
말씀은 능력이어야 한다.
그 조건이 바로 지키는 것이다.
홍해 앞의 모세가 말씀을 받았다.
'지팡이를 내 밀어라'
말씀을 들었다.
언제 갈라지는가?
들 때이다.
던져도 안된다.
들 때이다.
내 밀 때이다.
반석에서 물을 주겠다 했다.
한번은 치라 했다.
쳤다.
물이 나왔다.
온 이스라엘이 넉넉히 먹기에 남았다.
모세도 좋았고, 백성도 좋았다.
그리고 한번은 그냥 명령을 하라 했다.
그런데 명령을 안하고 두번이나 쳤다.
물은 나왔다.
하지만 그 기적은 저주가 되었다.
모세를 가나안에 못들어가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말씀대로 할 때 기적은 축복이 된다.
치라 할 때는 치고,
명령을 하라고 할 때는 명령을 해야 한다.
기적이 저주가 되는 것은 말씀대로 지키지 않을 때이다.
들어야 체질을 바꿀 수 있다.
들은 말씀은 지킬 때 평탄함이 오고 형통함이 온다.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지키려고 하지 말라.
먼저 들어라.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지킨다.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것이다.
계속 반복적으로 들리는 음성이 있을 것이다.
광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하는 장소이다.
그것을 지키라.
그것이 형통, 평탄의 지름길이다.
이렇게 안하고 늘 뜬구름 잡는 말씀을 하려면 안 된다.
제발 듣고, 그리고 지키라.
듣는 것이 먼저다.
마지막으로 나와 공동체에게 동일하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다.
하나님의 나와 함께함은 나만을 위한 함께함이 아니다.
나와 함께함은 공동체를 위한 함께함이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신다' 했다
물론 하나님은 나와 함께하신다.
하지만 글의 서두에 이미 밝힌 대로
나는 공동체 안에 있을 때 그 존재적 가치가 함께 드러난다.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가치는 나를 통해 공동체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와 함께 하다는 의미는 내가 공동체를 위할 때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이다.
내가 나를 위해 사는 순간 나는 하나님과 함께 없다는 말이다.
혹자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이건 모세나 여호수아 같이 사역자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닌가?
이 공동체적 문제가 사역자만 위한 말씀인가?
아니다.
성도들,
온 공동체가 함께 지켜야 할 말씀이다.
아간을 기억해야 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기억해야한다.
그리고 한가지더!
이스라엘에게 여호수아가 그런 공동체적 사명을 가지고 나올 때
이스라엘백성, 공동체들은 어떻게 했는가?
너나 할 것 없이 이 마음에 동참하고
이미 받은 두지파 반-르우벤,갓, 므낫세 반 지파는
먼저 앞장서서 싸우겠고
이 전쟁이 끝나면 가족에게 돌아가겠다 한다.
이들도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공동체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모습을 본다.
뿐만 아니다.
그 외의 모든 백성들은 그 공동체를 위하여 여호수아가 앞서 행하고
말씀만 하면 우리가 다 행하고,
당신이 보내면 우리가 가고,
명령을 거역하거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며
죽음을 건 각오와 결심을 말하고 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픈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공동체를 세워가기 원하신다.
그 마음을 이해해 드릴 때
나는 하나님과 더욱 동행의 삶을 살 것이다.
그것이 형통이다.
이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라고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성경은 말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이 아름답다라고.
[신8:7]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하나님은 우리가,
내가 아니라 우리가 그땅에 이르게 하시길 원하신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이 온땅에 아름답다고 말씀하신다.
여호와 그분이 우리에게 아름다움이다.
[시8:1]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아름다운 열매이다.
아름다운 열매를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5장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것이 사명이라 하는데
[마7: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나니
그 열매가 무엇인가?
요한복은 15장은 연이어서 이야기한다.
그 열매,
이세상에서 좋은 나무가 맺는 아름다운 열매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했다.
요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하나님은 우리를 아름다운 땅에 거하도록 하신다.
그래서 거기에 살도록 인도하신다.
그곳에는 우리가 거하는 곳이 아름다운 곳이고,
여호와의 이름이 아름다움이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아름다운 열매.
곧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마음과,
헌신과,
섬김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
바로 사랑이라 했다.
가나안의 완성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장소와
그분의 거룩한 이름과
우리의 공동체를 향한,
한 영혼, 한 사람을 향한
목숨을 내놓는 나의 사랑이 있을 때
진정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존재론적 완성은 공동체 안에서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에덴동산은 이 세가지가 있는 곳이
에덴동산이고
가나안이며
예수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천국이다.
우리는 그것을 연습하는 곳으로
교회를
공동체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한 가수의 노래가 생각난다.
그 노래는 만남이다.
무슨 목사가 이런 노래를 말하나 하지만
개사를 하니 좋아진다.
만남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건 우리도 몰랐던 영혼의 바램이었어
그냥 모른체 지나기엔
하나님의 바램이었기에
잘 할수는 없지만 영원을 향하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하나님은 나와 함께하시고
공동체 속에서 완성된 내 영혼의 충만을 보기 원하신다.
모세가 지팡이를 내밀 때 홍해가 갈라진 것처럼
우리가 불가능 할 것 같은 상황에서
그분의 사랑을 내 삶 속에서 공동체를 향한 사랑으로 증거해 낼 때
나를 통해 거룩한 나라는 완성되어 질것이다.
교회는 일이 아니다.
이 아름다움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곳이 교회이다.
일은 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어야 한다.
일은 사랑하기 위해서만 필요하다.
나의 완성된 존재와
나로 인해 완성되어진 천국을 위해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친구가 지금 기억나지 않는가?
그를 향하여 여러분의 영혼의 손길을 뻗어
내 영혼의 완성과
아름다운 가나안을 완성해보자.
그 말걸음이 천국가는 진정한 발걸음이 될것이다.
나는 여러분을,
나의 공동체를 사랑한다.
이 땅에서 내 영혼의 완성은 오직 여러분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을 떠나던 날부터
수 천년 동안 그토록 원하시던
하나님의 간절하고 뜨거운
유일한 바램입니다.
바는 그 바램을 나를 통해 이루어 드리기 원합니다.
하나님!
그 마음을 몰라드려 죄송합니다.
내 것만 보고 달렸습니다.
내 것만 채워지면 하나님 기뻐할 줄 알았습니다.
내 것이 채워질수록
나 몰래 눈물 흘리시며
집 나간 탕자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나를 기다리던 아버지의 마음을 오늘에야 압니다.
아버지!
저는 불효자입니다.
관속에 계신 돌아가신 아버지 앞에서
그 아버지 나에게 주신 마지막 선물
'내 사랑을 고백하며 살겠습니다'했던
그 의미가
이제야 하늘 아버지가
육신의 아버지를 통해 주신 선물인 것을!
내 이제야 압니다.
하나님!
아담 하와 에덴 떠나던 날
다시 회복될 영원한 나라 소망하며
지금까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집 나간 자식들 아파하는 아버지의 마음
이제야 아오니!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 날위해 모범을 보이시니
예수님 내친구라 내친구라
내가 한영혼 위해 목숨버릴때
예수님 날 향해
내 친구라 말씀하시니
내 영혼 감격이고
내 몸과 영혼이 춤을 춥니다.
그 깊은 사랑을 이제 내가 아오니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돌아온 탕자가 이제 집에가오니
그 탕자가 불신자가 아니고
성도가 아니고
그탕자가 저입니다.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박넝쿨 아끼던
요나를 향해
가슴치며 우셨을 하나님 때문에
내 눈에 눈물이
내 마음에 요동치는 탄식이
하늘을 울립니다.
아버지,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아버지!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