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님이면 다인가?
신34: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담임목사에게 잘하면 잘 되는가?
한국교회 안에는 담임목사님에 대해서 특별한 생각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담임목사님에게 잘하면 복을 받는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담임목사님을 잘 섬기려고 노력하고,
그분의 마음에 나지 않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하고 애쓰는 모습을 본다.
가능하면 목사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하고
가능하면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게 된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하자.
담임목사님에게 잘하면 복을 받는다?
맞다 아니면 아니다.
어느 것이 정답인가?
하나님은 왜 모세를 세우셨는가?
왜 이스라엘에게 모세를 담임목사로 세우셨는가?
왜 모세인가?
이유는 하나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지명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른다. 왜 그 사람인지?
하지만 한가지 아는 것은 그 공동체에게 그 사람이 가장 적당했기 때문이다.
그 공동체에 모세가 가장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왜 여호수아를 세우셨는가?
모세는 부르심을 받을 때, 거의 죽을 만큼 거부했다.
아마 모세가 정탐을 갔으면 부정적 보고를 했던 10명 안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믿음의 보고를 했다.
그리고 40년을 모세 옆에서 수 없는 영적 훈련을 거쳤다.
가나안 정복은 '믿음과 현장의 경험이 있는 여호수아가 맞다'고 여기신 것이다.
적당하다는 말은 그 공동체의 영적 수준에 맞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영적 수준에 맞다는 말은
그들의 믿음대로 담임목사를 보내셔서 훈련하시고 세우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예루살렘의 유대 사람들을 두고 베드로를 사역하게 하셨고,
이방을 위하여 바울을 세우셨는가?
그것이 공동체와 그 리더가 맞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가장 잘 아신다.
왜 어느 교회는 좋은 목사를 보내주고
왜 어느 교회는 삯꾼 같은 목자를 짊어지고 있어야 하는가?
정답은 그 공동체의 수준대로 보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아신다.
그 공동체의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왜 지금 목사님이 공동체에게 아픔이 되는지 혹 기쁨이 되는지?
그것은 좋은 공동체 속에 좋은 목사가 있고
안좋은 공동체 속에 안좋은 목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좋게 시작했다 중간에 안좋아지는 목사가 있고
좋게 출발했다 악의 시험으로 마음이 악해지는 공동체도 있다.
사울왕이 그렇고 사사기 시대가 그렇다.
물론 안좋은 공동체 속에 좋은 목사가 있다.
하나님의 복이다.
그런데 이런 교회는 결국 힘들어진다.
모세와 이스라엘 같은 모습이다.
모세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장 좋은 출발을 했지만
결국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 때문에 실수하고 가나안에 가지 못한다.
목사가 좋은 공동체를 만나는 것,
공동체가 좋은 목사를 만나는 것은 하늘이 준 복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자기의 수준대로 목사를 맡는다.
한가지 중요한 것은
공동체와 목사는 유기체적이어서 한쪽만을 결과의 이유라고 말할 수 없다.
한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과거 그들의 믿음의 모습이 어떠했는가'이다.
무슨말인가?
과거에 교회가 영적으로 안좋은 토양, 분위기, 행위가 있었다면
그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의 훈련, 광야의 시간을 지낸다.
그것은 나라와 민족을 통해서 잘 볼 수 있다.
남아공은 수없는 자원과 종교의 자유 속에 있었지만,
믿음의 조상들이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살면서 말씀대로 사는 것에는 등한시 했다.
결국 흑백분리정책으로 온 세계의 압박과 내분을 통해 결국 흑인정부가 들어섰지만,
이 나라 교회는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죄로
아픔의 시간을 지날수 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 지도자는 어떤 사람이 나올 것인가?
답은 쉽게 나온다.
이상한 지도자,
상식적이지 않은 지도자가 나올 수 밖에 없다.
세상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와 같이 간다.
특별히 하나님의 교회가 있는 곳은 더하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조상적, 앞 몇년 혹 그 이상의 믿음의 선배들이 어떤 공동체적 믿음의 색깔을
가졌느냐에 따라 지도자는 결정된다.
앞 믿음의 선배들이 좋은 목사님을 모시고 잘 섬기고 하나님의 교회를 잘 섬겼으면
후세들도 별 어려움 없이 교회와 성도들이 은혜 가운데 축복을 경험한다.
하지만 믿음의 선배, 교회의 리더들이 잘못된 모습으로 그 시간을 보냈다면
그 결과는 지금의 담임목사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앞 선배들이 담임목사를 꼼짝도 못하게 힘들게 했다면
그 다음 사역자는 이 사람들을 꼼짝도 못하게 하는 담임목사가 올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교회뿐 아니라 각 부서 교역자도 마찬가지이다.
15년 전, 어느 교회에 참 귀한 목사님이 담임목사님으로 계셨었다.
양들을 사랑하고 어질고 별 말없이 사람을 도와 많은 사람이 그 사랑을 입었다.
그런데 장로님들이 목사님 어질다고 싫어하고 박력 없다고 싫어하고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장로 못됐다고 목사님 집을 찾아가 욕을 하고 했다.
그 때 어떤 성도도 말을 하지 않아 목사님은 당하기만 했다.
교회는 바른 목사님을 핍박하고 어렵게 하는데 동조한 것이다.
결국 목사님은 병이 생겨 돌아가셨다.
장례식을 통해 알게된 것은 이 목사님께서 그 어려운 형편에 수 없는 사람들을 도와
너무 많은 사람들이 문상을 오고 살아생전에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이야기들을 들은 것이다.
이 목사님은 참 귀한 목사님이셨는데 교회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영적으로 악한 모습으로
대한 것이다.
그 후에 어떤 목회자가 왔을까?
불을 보듯 뻔하다.
박력 있고 설교도 잘하고 말도 잘하고 정치도 잘하는 목사님이 오셨다.
그런데 이분은 결국 재정 유용과 간통죄로 쫓겨났다.
그 후에 또 목사님이 오셨는데 나름 열심히 하시지만 교회는 계속 어려움을 겪는다.
목사님들이 문제가 아니다.
공동체가 악을 행하면 하나님은 그에 맞는 사역자를 보내신다.
물론 공동체 중에 선하고 말 없이 섬기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들이 세운 리더들, 장로님들의 악이 결국 그 성도를 대표하므로 대표성의 원칙에 따라
하나님은 대우해 주신다.
주위의 교회를 한번 생각해 보라.
한번 담임목사님을 쫓아내는 교회는 자꾸 쫓아낸다.
한번 깨지는 교회는 자꾸 깨어진다.
이스라엘이 아론과 금송아지를 만들 때 어디 모두가 다 만들었겠는가?
리더들이 앞장 서서 하고 그들이 주도했을 것이다.
성도들은 멋도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리더의 행동은 곧 공동체의 행동이다.
그래서 교회의 리더는 목숨 걸고 좋은 사람을 뽑아야 한다.
좋은 사람을 목숨 걸고 길러내야 하고
좋은 사람을 세우지 않으면 교회는 결국 악하게 된다.
좋은 리더가 없으면 세우지 마라. 그래야 공동체가 사는 길이다.
마찬가지로 목사님을 청빙할 때, 정말 목숨걸고 기도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우리 공동체의 과거와 현재를 보고 필요한,
지금까지의 교회의 역사를 바꿀 좋은 사역자를 뽑아야 한다.
금식도 해야한다.
철야도 해야한다.
잘못 뽑은 목사 한사람 때문에 온 교회가 짧게는 몇년에서 길게는 몇 십년을 고생하게 된다.
과거를 통회하고 우리의 영적 흐름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개 교회의 역사를 잘 아는 분들은 생각해 보라.
각 부서의 역사를 잘 아는 분들은 생각해 보라.
앞선 선배들, 앞 선교사들이 어떠한가가 지금의 분위기를 만든다.
이상하게 어떤 부서는 열심히 해도 안된다.
과거를 한번 짚어보라. 과거에 분명히 좋지 못한 토양이 있을 것이다.
혹 지금 리더들 중에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은 없는지 살펴보라.
남아공은 교회가 오래 전부터 있었다.
복음이 전해졌다.
하지만 지금 복음을 전하기가 너무 어렵다.
좋은 사역자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앞선 믿음을 받은 선배 목사들이 잘못해서 그렇다.
무슨 말인가?
앞선 목사들이 다 조상을 숭배하고 조상 제사를 지냈다.
주일을 쉽게 생각하고
악을 쉽게 범했다.
몇 십년이 흐르면서 지금 젊은 바른 목사들이 회개의 분위기를 만든다.
노회 안에도 조상 숭배를 허락하는 노장파와 안된다는 젊은 목사들이 싸우고 있다.
이 나라는 백인과 함께 흑인도 교회 안에서 리더들이 범죄함으로 좋은 목사 만나기가
하늘에 별 따기이다.
과거의 역사가 해결되어야 다시 시작하시는 하나님이다.
좋은 목사는 좋은 공동체가 만든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복이다.
아무에게나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지 않는다.
과거가 해결될 때까지 하나님은 40년을 기다리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한번 결정된 담임목사님은 다시 바꿀 수 없다.
오기 전에 목숨 걸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고 간청해야 한다.
눈물로 돌이키고 바꾸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람이 올 가능성은 적다.
공동체의 역사적 흐름속에 리더는 나온다.
그 공동체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 공동체가 세롭게 세워지려면 과거의 모습을 정리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좋은 사역자가 나오지 않았다.
왜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세례요한을 보내어 그 길을 예비 하셨을까를 생각해 보라.
그냥 예수님께서 오시면 되지 왜 한 사람의 평생에 그런 고생을 하게 하는가?
영적인 문제는 '그냥 하면 되지'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 풀어야 한다.
반드시 회개의 시간을 보내고 정리를 해야된다.
그래야 그 다음 공동체가 하나님의 빛을 보게 된다.
담임목사라는 의미가 뭔가 생각해보자.
담임목사면 다인가?
결론은 다다!
서목사가 미쳤나?
미쳤다 해도 어쩔 수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를 담임목사에게 위임 하셨다.
그래서 위임목사라고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내게 오는 양떼를 네게 부탁한다 했다.
위임이다.
일단 위임이 되면 아무도 손을 못댄다.
그 교회는 그 목사님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양무리를 돌보게 된다.
그래서 앞서 말한 내용대로 담임목사는 너무도 중요하다.
하나님의 교회는 담임목사를 통해 그 교회의 방향과 비전, 뜻, 길이 결정된다.
하나님은 그 목회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진행하시고 열매를 맺으신다.
물론 장로님들이 있다.
하지만 목회자와 동역 하지만 하나님은 목회자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그분의 뜻을 보여주시고 마음을 주시고 길을 여시는 분이시다.
성경은 그런자를 '대사'라 한다.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자'란 말이다.
가장 대표적인 직분이 사도들이다.
그리고 그일을 맡은 목사들이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하는 것이다.
성도 입장에서 걱정말라.
목회자의 존재는 성도들을 위함이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성도들에게 축복을 전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목회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내 것으로 ,
양들을 내 마음대로 하는 목자는 이미 가짜다.
목회자의 존재는 철저히 성도들을 돌보고 섬기고
말씀으로 그들을 하나님께 앞에 서게 하는 사람이다.
자 그럼 어떤 목회자가 좋은 목회자인가?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서 한번 보자.
첫째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목회적 소명이 있는 사람이다.
그 공동체의 사역자로 부르셨는가 하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모세와 여호수아처럼 목회적 소명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부르셨다.
출3: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출애굽과 함께 예배하는 백성으로 세우는 것이 모세의 소명이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하여 그들로 그 땅에서 안식하게 하는 것이다.
이 부름을 명확하게 받았는지가 중요하다.
어느 교회를 맡든지 그 교회를 향해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셨는지,
개척을 할 때 개척의 사명을 주셨는지, 명확하게 사명을 받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부름 받은 사람이 왜 중요한가?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부르셔야 일하시고 책임지신다.
하나님이 세우셔야 지키시고, 하나님이 시작하셔야 마무리 하신다.
괜히 사명 없는 사람 불러다 놓으면 다 망한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인지 그것을 확인해야 한다.
사람들이 이력서를 보고 학벌을 보고 얼굴을 보고 설교를 들어보고 '괜찮네' 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보내시는 분인가?'를 분별하기 위해 온 교회가 기도하고 금식하고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모세는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고 말하라'고 했다.
사역자가 이 자신이 있는지 그것을 확인하라.
하나님께서 나를 이 교회에, 이 개척에 쓰신다는 확신을 확인하라.
이 물음에 답을 못하면 아니다.
설교 좀 듣고 말 잘하고 학력이 좋다하여 우리 교회에 맞다고 생각한다면 참 가슴 아픈 일이다.
둘째로 하나님을 만났고 지금도 그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인지 확인하라.
이것은 과거의 하나님만 붙들고 사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은 현재의 하나님이시다.
그것을 성도가 어떻게 아는가?
지혜의 영이 충만한가를 확인하라.
묻고 들은 것으로 사역하는 사람!
즉 기도의 체험, 말씀의 체험을 가진 사람이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다. 그는 기도의 체험으로 지혜를 얻었다.
말씀의 특별함이 있다.
모세도 그렇고 여호수아도 그런 체험들을 다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눈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이 보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사람을 말한다.
이것을 교회가 짧은 시간에 알기라 어렵다.
그래서 사역자를 모실 때 오랜시간 기도하고 지켜보고 알아보고 해야한다.
결혼할 사람도 연애를 통해 오랫동안 서로를 알아본다.
하물며 우리의 영혼과 삶을 인도할 목자를 세우는데 이력서 보고 설교 한번 듣고
학위증으로 검증하면 하나님의 뜻과 다르다.
비록 몇 달이 걸리고 일년이 걸려도 진짜 좋은 목자를 맞아야 교회의 미래가 있다.
지혜가 있다는 말은 성도들을 잘 세우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지혜의 목적은 사람을 세우기 위해, 교회를 말씀으로 잘 이끄는 것을 말한다.
솔로몬의 지혜의 목적은 사람을 잘 다스리고 세우는 것이다.
양들을 하나님의 마음, 목자의 마음으로 대하고 세우는 것이 지혜이다.
그것을 잘 분별해야 교회는 건강하게 자란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공동체가 된다.
하나님이 사람, 하나님의 사역자가
사람을 세우고 돌보며 인도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이다.
셋째는 앞서 행하는 자이다. 신앙이 모범과 삶의 모범이 있는 자 이다.
요즘은 말씀을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런데 성경은 '말씀은 하나님께'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잘하는 것은 말이다.
말 잘하는 사람을 좇지 말라.
들은 말씀을 스스로 먼저 따르고 모범을 보이는 자인지 확인하라.
그의 삶이 어떤지 말씀의 증거가 삶 속에 있는지를 보라.
적어도 말씀 앞에 정직한지를 봐야 한다.
사람은 다 잘할 수 없다.
약하고 부족한 것이 더 많은 것이 사역자이다.
그렇지만 정직함에 대해서 실패하면
어떤 말도, 말씀도, 삶도 권위를 잃어버린다.
권위를 잃은 목자는 이미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아~ 있다.
정직하게 회개하면 된다.
하나님의 긍휼로 회복될 수 있다.
사람들은 혹 허물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싫어할꺼라 생각하고 자꾸 감추려 한다.
아니다! 요즘 성도들은 허물을 감추려는 사역자보다
허물을 정직하게 내어놓는 정직함을 사랑하고 그런 사람을 더욱 귀하게 여긴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앞서 행했다.
바로 앞에 직접 갔고 홍해 앞에서 지팡이를 들었으며 말씀을 좇아 40일을 금식하고
싸울 때, 최전방에서 칼을 들었으며 죽을 각오로 싸웠다.
교회는 앞서 행하는 목자를 기다린다.
넷째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역자이다.
모세도 그렇고 여호수아도 그렇고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한 것이다.
세상의 사역자라도 다 사역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역자,
특별히 사역적이 측면에서, 목회적이 측면에서 함께 하는 자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와 늘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는 것과 공동체가 세상을 향하여 나아갈 때,
그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것과는 다르다.
요셉은 하는 일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
그는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할 때에 구하는 기초로 하나님께서 보내셨다.
하나님께서 기도 가운데 함께 할 때 응답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할 때 말씀 속에 능력이 있다.
이런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다.
하나님으로부터의 확신이 있기에 사람에게 숨으려 하지도, 사람을 의지 하지도 않는다.
아닌 것은 아니라 말할 수 있고,
굳이 힘 있는 사람을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
굳이 유명한 자를 곁에 두려하지 않는다.
굳이 돈 많은 사람을 옆에 끼려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께서 함께함을 기쁨으로 여기고
사람에 메이지 않는 순수하고 순결한 사역자가 될 수 있다.
이런 사람을 기도하면서 찾으라.
하나님은 핍박의 때에도 칠천을 남겨 놓으신 분이다.
공동체가 기도하고 금식하고 그 얼굴을 구하면
나와 내 자녀들이 축복을 보장받는 하나님의 사역자를 보내주신다.
이제 생각할 것은 교회가,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이다.
첫째로 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론과 같이 갈 때
온 성도와 장로들이 그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받았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이 세우셨을 때 장로들과 성도들은 여호수아 당신은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 맞다고 한 마음으로 그를 받았고,
시키는 대로 하겠고, 당신의 말을 청종하겠고
말을 듣지 않으면 그 사람은 죽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교회는 유기체이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로부터 온 교회가 하나 될 때 싸울 수 있다.
영적인 전쟁이 가능하다.
우리는 세상의 유일한 대안인 교회이다.
그런데 교회가 분열되면 일이 안된다.
왜 교회가 힘을 쓰지 못하는가?
하나가 되지 않아서이다.
하나 될 때,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싸울 기술을 익히기 전에 하나됨을 원하신다.
언제 이스라엘이 전쟁이 실패했나?
아간이 죄를 범할 때이다.
하나되지 못할 때 그들은 망한다.
담임목사님을 한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어떤 목사가 와도 그 교회는 힘든 과정을 지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마음은 만약 나를 목회자로 부르신다면
온 장로님들과 교회가 한 마음으로 받는 교회를 가야한다 여긴다.
어떤 사역자라 할지라도 이런 영적인 원칙 없이 가면 이것 하나 만드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앞서도 말했지만 리더들의 마음 밭, 리더들의 마음이 중요하다.
된다 안된다에 초점을 두며 늘 싸운다면 어떤 사람이 와도 그 교회는 평안하지 않다.
어떤 이가 와도 한 마음이면 하나님께서 세우신다.
둘째로 목회자의 말씀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고 목숨걸고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은 교회를 목회자를 통해서 인도하신다.
그런데 그 목회자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계절을 따라 이동하는 초원에 누우처럼,
코끼리처럼 길에서 죽는다.
아무리 덩치가 크고, 힘이 좋아도 말씀이 없는 곳에는 영혼이 말라간다.
죽어라 기도하고 하나님이 주신 확신으로 목회자를 받았으면 그 말씀을 내 생명,
내 영혼을 위한 것으로 믿고 따라가야 가나안에 들어간다.
이것이 영적 법칙이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가기 전에 한 것은 이것이다. 이 각오이다. 이 결심이다.
셋째로 영적 아버지로 여기고 따라야 한다.
'모세를 청종한 것 같이 당신을 청종하려니와'(수2:17)
모세는 이스라엘의 영적 아버지였다.
영적 리더였다.
영적 목자였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향하여 그것을 인정하고 따르겠다고 한다.
젊고 나이가 들고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과 삶을 위해 세우시고 보내신 영적 목자로 인정하는 것이 시작이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영혼이 불편해서 삶도 불편해진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이다.
스스로 세우려는 권위는 분열을 가져온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이 공동체에 이 분을 주셨다는 믿음이 시작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담임목사로서의 소명을 주지 않았다.
나를 대신하여 갈 길을 먼저 가서 나를 인도할 사람으로 담임목사를 주셨다.
내가 보지 못하고,
내가 듣지 못한 것을 먼저 듣고, 보고, 모범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을 찾아 가도록 인도하는 사람이다.
내가 나의 소명을 받을 때까지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담임목사를 세운 것이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이 교회의 목사가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셨음을 기억해야한다.
예수님의 양을 대신 맡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목회자가 마지막까지 자신의 직임과 직책에 최선을 다하여
바른길을 갈것인가는 자신의 믿음에 있다.
자신의 책임이다.
사울은 중간에 실패했다.
다윗도 중간에 실수를 했다.
모세도 중간에 실수를 했다.
모두 실수한다.
그 실수는 치명적으로 공동체에게 돌아간다.
리더의 실수에 따른 책임의 반은 공동체에 있다.
왜냐하면 그 실수의 책임을 교회가 함께 지기 때문이다.
리더가 실수하기 전에 돌보고 세우고
죄를 범하지 않도록 돕는 것은 공동체의 책임이다.
그렇지 않으면 함께 고통을 당한다.
그리고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대사로 사역자를 주셨다면
그 사람의 허물이나 약함을 보지 않고 말씀을 전하는 자로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 자체를 듣고 행하는 것은 공동체의 책임으로 넘어온다.
사역자의 문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그 사역자의 허물이 없으면 좋지만 허물 때문에 내가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받는데 걸림이 되어 말씀의 순종이 나에게 사라진다면
그것은 나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사역자 때문에 나의 영적인 문제가 이렇습니다'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미 말했듯이 내가 존경하고 따르고 인정할 사역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영적으로 구해야 말씀 안에서 영혼이 자라게 된다.
구약의 수 많은 말씀 속에 사역자의 허물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위이다.
허물을 보지말라.
허물많은 자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고
그 말씀듣기를 사모하고 순종하기를 기뻐해야한다.
할 수 없는 때에 하는 것이 믿음이고 하나님에 대한 인정이다.
하나님은 지금 그것을 테스트하고 계신다.
자 여기서 앞에서 한 질문의 답을 보자.
담임목사님에게 잘하면 잘되고 못하는 못 되는가?
정답은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
담임목사가 복을 주는 주체가 아니다.
담임목사님에게 잘하면 복을 받고
담임목사님을 잘못 대접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은 이미 그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럼 뭔가?
담임목사남울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목자로 내가 인정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우시는 권위에 대한 문제이지
내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하나님의 권위로 인정하면 그 사람은 잘하지 말라 해도 잘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로 인정하지 않는 순간 이미 나는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부터 멀어 진 것이다.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 이전에 자세에 관한 문제이다.
좋은 자세를 가지면 좋은 결과가 온다.
하나님의 인도하시고 세우신 것으로 인정하고 받으면 이미 복이다.
그럼 내가 잘하지 않아도, 아무 말 안해도
목사님을 통해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담임목사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미 그 사람은 그 목사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
야곱이 죽기전에 뭐했는가?
모세가 죽기전에 뭘했는가?
자녀들을 축복했다.
자신이 목회했던 사람들을 축복했다.
살아왔던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에 의지해 온 맘을 다해 축복을 했다.
그 축복이 우리가 매주 받는 축도이다.
목사님의 그 축도는 그냥 축도가 아니라
야곱이, 모세가 하나님께 드렸던 그 능력의 축도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매주 우리에게 흘러오는 것이다.
받을 자세가 되어 있으면 이미 그 사람은 담임목사님과 좋은 관계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미 잘못하게 될 것이다.
담임목사님께 잘해도 안되는 사람은 안된다.
담임목사님께 잘 못해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말씀의 흐름을 따라 하나님 앞에 산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세 그것이 복과 저주의 갈림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교회가 마음이 들지 않으면 옮긴다.
물론 옮겨야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것도 다시 생각해 볼 문제이다.
내가 예수를 믿고 싶어서 믿었나?
아니면 예수를 믿는 믿음을 주셔서 믿었나?
자신의 의지로 담임목사가, 이 교회 위임목사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되게 하셨는가?
모두 다 하나님께서 믿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자리를 주셨기 때문에 이자리에 있다.
목회자가 교회를 자기 것인양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이나
성도가 자기 마음대로 교회를 결정하고
옮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문제이다.
사역자가 교회를 결정할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인도하심을 구하듯
성도도 이 교회를 보내신 이유를 구하고 그 뜻과 사명을 다했으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과 조금 틀어졌다고,
사람들과 조금 맞지 않다고 교회를 옮기는 것은
그 틀어짐을 통해서 나를 훈련하시는 하나님을 모르고
훈련을 마쳐버리는 것과 같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곳에 가 봐야 더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 집사람은 언니 피해 시집왔더니
내가 기다리고 있더라고 말한다. ^^
마쳐야 할 훈련을 이 교회,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마쳐야
하나님은 다른 곳으로 옮기실 생각을 해 본다.
그런데 훈련이 마쳐지지 않았는데
사람 때문에 옮긴다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가 봐야 문제가 많다.
담임목사는 공동체와 개인을 훈련시키는 사람이다.
돌본다는 것은 성숙하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아픔이든 기쁨이든 하나님은 모두 다 사용하신다.
그런데 담임목사를 그저 담임목사 문제로 여긴다면 그 공동체는 아직이다.
담임목사님을 통해 좋은 꼴로 인도되는 것도 있지만,
담임목사님을 통해 훈련하시고 연단하시는 하나님도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공동체의 영적 수준, 믿음의 수준과 연관된다.
한국교회가 목회자로 많이 아파함을 본다.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우리 목회자에게 물을 것이다.
목회자가 자기의 사명을 잊고 엉뚱한 곳으로 가면 공동체는 답을 찾지 못한다.
먼저 좋은 목회자가 오기를 기도해야 하고,
다음은 목회자가 바른 길을 가도록 기도하고
그리고 목회자에게 좋은 자극을 늘 주어야한다.
이 자극이 없이 좋은 소리와
좋은 대접만 있다면 누군들 타락하지 않으며
엉뚱한 길을 가지 않겠는가?
주변에 자포자기한 사람들을 많이 본다.
주 안에 있는 자포자기는 하나님이 건져주시지만,
세상속에 있는 자포자기는 인생의 끝이다.
우리가 우리의 손을 내려놓고
우리의 힘을 내려놓고 진정 그분의 일하심을 기대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실 것이다.
목회자가 바른 길을 가지 못한다면
교회는 소망이 없다.
성도들이여! 목회자에게 자극을 주라.
성도들이여! 목회자에게 열 번의 칭찬과 한 번의 바른 말을 주라.
열 번 식사 대접하고 한번 진지한 대화를 하라.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 하는가?
진심으로 기도하면 언제까지인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금 교회에 보내신 목적과 이유가 분명히 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그 곳에, 그 장소에 세우신 목적이 있다.
그것이 사라진다면 그 곳에 교회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역사 속의 수많은 사라진 교회를 기억하라.
목회자도, 성도들도 이것을 기억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역사 속에 사라지는 교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교회의 목적을 다시 새롭게하며
그것을 놓치지 않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된다면
우리는 영원히 가나안에서 평안을 누릴 것이라 믿는다.
오늘은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어떤 사역자가 되어야하는지 나에게 말씀해주셨다.
하나님의 붙드심으로 그분의 영광이 내 삶을 통하여 드러나기리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