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
꺼져가는 심지에서 타오르는 불꽃으로
신명기33:1
하루만에 물밀들 밀려오는 감동들을 기록하고 보니 세편이 되었다.
오늘은 내 성경책을 펴지 않으리라 나도 좀 쉬어야겠다 굳게 마음을 먹고
아내와 잔디에서 의자를 펴고 대화를 하는데 또다시 밀려오는 영감으로
머리에 정리해보지만 그 분량이 너무 많아 다시 책상으로 뛰어왔다.
오늘 하루만은 좀 쉬어야겠다 싶지만,
가슴속에 부어지는 말씀의 부음들이 나를 가만있지 못하게 한다.
이건 뭔가? 이게 뭘까?
알 수 없는 여정 속에 그저 주시는 마음 따라 간다.
기도가 왔다.
이제는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곳까지 왔다.
목까지 차오르는 말못할 영혼의 울부짖음이 이제는 한계가 왔다.
그러던중 오늘 제목이 왔다.
왜 월요일부터 이제 기도구나라고 마음을 주셨는지 이제야 알겠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것이구나.
이 시간을 기다리셨구나!
주님 내 영혼을 새롭게 하소서!
거부할수 없는 타는 목마름으로 내 골수에 사무치며 불붙는 불꽃을 허락하소서!
꺼져가는 심지
겨우 심지를 태우려고 사는 우리의 욕심을 내려 놓아야 한다.
겨우 내 미래를 고민하고 안락한 삶을 향한 기도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으로 우리의 등불에 불을 붙일 수 없다.
우리는 등불을 넘어 거룩한 불꽃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
모세는 자신의 열심과 뜨거움으로 열심을 내었지만 자신의 심지도 겨우 태우는 인생을 살았다.
아니 꺼져가는 심지가 죽지 않도록 죽어라 노력하며 고민하고 기도하며 살았다.
자신의 기대와 자신이 만든 목표가 사라지자 세상의 모든 시름으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발걸음이 바로 우리의 발걸음이다.
평생 기도도하고 예배도 드리지만 꺼져가는 내 등불의 심지에
겨우 불 붙이는 일로 세월을 다 보내고 있다.
예배를 드릴수록,
교회의 일을 할수록 허전해 지는 우리의 마음을 어쩔 줄 몰라 하며
발만 동동 구르는 수많은 영혼들의 가슴 치는 소리에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슴을 치는 타는 목마름이 한아름 내 가슴속에 떨어진다.
사람마다 하나님의 불씨를 가지고 산다.
주를 위해 살겠다고 헌신하겠다고 각오도하고 고백도하지만
겨우 심지에 불을 붙이고 사는 것도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무엇이 문제인가?
어디서 잘못이 되었는가?
오늘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우리는 불씨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한번 은혜를 받으면 잠깐 불씨가 타지만 이내 바람에 그 불씨마저 꺼질 지경이다.
우리는 평생 불씨로 살아간다.
타오르기 위해 아니 꺼지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처절한 상처 입은 사람들이다.
더욱이 내 불을 끄려는 것들이 도처에서 도사리고 있다.
아내가 그 일을 하고 남편이 그 일을 한다.
좀 살려놓으면 얼마나 잘 아는지 금새 알아차리고 불을 끄러 온다.
불을 살려야 한다.
불씨가 타올라 타오르는 불꽃으로 살아야 한다.
불이 타는 원리는 간단하다.
불씨들이 모이면 된다.
혼자 하려니 불꽃이 되지 않는다.
왜 다들 혼자 죽어라 애쓰는지 모른다.
나와 맞지 않아서,
나와 달라서,
나와 수준이 맞지 않아서.
아니다. 초대교회는 너나없이 다 모였다.
나는 혼자 살수 없다.
모여야 한다.
모여서 서로의 불에 의지해 함께 타야 한다.
지속적 불씨를 공급받아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불씨는 반드시 꺼진다.
불을 보듯 뻔한 것이 불씨를 보면 뻔하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지속적으로 불씨를 공급 받을때 불씨는 불꽃이 된다.
하늘로부터의 불을 받아야 한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구약이나 신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불로 왔다.
불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불기둥으로 이스라엘과 함께하셨다.
하나님은 불이시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는 장면에서 쪼개진 고기 사이로 횃불이 지나간다.
이것은 언약을 할때의 당시 사람들의 의식이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이 아브라함과 불로 임하셔서 언약을 맺으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다.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과 함께함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임재는 불로 임한다.
하나님은 불이시기 때문이다.
모세가 율법을 받은 십계명은 불 같다고 했다.(신33:2)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만든 율법, 십계명은 불 같은 율법이라 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불로 표현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날 때 불 가운데 임하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타는 떨기나무가운데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다.
하나님의 불은 꺼지지 않음을 상징한다.
꺼지지 않는 불로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등불에서 타는 불꽃이 된다.
그런 하나님!
꺼지지 않은 그 하나님을 만났던 모세의 가슴은 불타는 가슴으로 40년을 지치지 않고
사역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불이 임할때 우리는 지치지 않고 불꽃으로 일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꽃으로 부르셨다.
[히1:7]~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우리는 등불로 살다가 꺼져가는 심지로 살다가 갈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은 겨우 내 인생 불 붙이고 겨우 끄지 않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으로 부르지 않으셨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그분의 영광과 위엄 앞에 타오르는 불꽃으로 살다 가도록 부르셨다.
하나님의 말은 불이다.
그분이 말씀 하실때 우리는 가슴에 불붙는 심정이 된다.
예수님께서 꺼져가는 심지로 돌아가는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말씀하실때
그들의 가슴이 뜨거워지게 만드셨다.
말씀은 불이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 승천하시기 전까지 몇일 동안 이 땅에 계셨는가?
40일동안이다.
왜?
그분은 그분의 사람들에게 그분의 말씀을 제자들의 가슴에 불을 심어주시기 위함이다.
가슴이 뜨겁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불씨를 붙여주기 위함이다.
그들 동일하게 불씨를 받았다.
하나님을 만날때 우리는 우리의 가슴에 불이 붙는다.
하나님의 불을 만난 사람은 변화된 언어와 변화된 그들의 삶으로 불붙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럼 어떻게 이 불씨를 불꽃으로 만들 것인가?
먼저, 기도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불씨를 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기도하도록 하셨다.
불씨는 함께 기도할 때 꺼지지 않고 뜨겁게 타오른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영원히 꺼지지 않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야 한다.
광채나는 얼굴
하나님의 불을 만나야 한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므로 불처럼 타올랐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므로 얼굴이 광채가 나서 사람들이 보지도 못했다.
예수님도 변화산에서 그분의 신분을 드러내자 그 얼굴의 광채가 빛이 났다.
그분의 눈은 불꽃이라 계시록 저자인 요한은 기록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존전 앞에 설 때 우리는 타는 불꽃이 되고
얼굴의 광채가 난다.
불씨가 꺼져가는 심지가 언제 불꽃이 되는가?
기도할 때이다.
기도속에서 깊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불씨가 불꽃이 된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다.
그래서 성령이 오실때까지 기도하라했다.
기도가 아니면 우리는 우리의 편에서 하나님의 존전 앞에 설수 없다.
이 기도를 통하여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꺼지지 않는 불을 만나게 된다.
오순절 성령이 하늘로부터 오게 된다.
이것을 체험한 사람들을 통해 지금까지 꺼지지 않은 불꽃으로 우리에게 전해져오고 있다.
하늘이 열려야 하늘로부터 불이신 하나님을 만난다.
불꽃은 하늘이 열려야 임한다.
언제 하늘이 열렸는가?
첫째, 예수님께서 세례를 통해 하늘이 열리셨다.
둘째,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이다.
셋째, 스데반이 순교할때이다.
넷째, 이방선교를 위해 베드로가 환상 중에 하늘이 열렸다.
다섯째, 기도할때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셨다.
기도가 아니면 우리는 성령을 경험할 수 없다.
우리의 입장에서 하늘을 여는 방법은 오직 기도 밖에 없다.
기도가 아니고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기도 중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봐야 한다.
하늘의 것을 사모해야 한다.
우리의 것은 꺼지게 하는것 밖에 없다.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기도가 아니고는 하늘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없다.
기도가 아니고는 하늘을 열수 있는 방법이 없다.
기도가 열려야 하늘이 열린다.
우리는 모두 복음을 통해 불씨를 받았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하지만 그 불씨가 언제 불꽃이 되는가?
그것은 기도 밖에 없다.
하나님을 지속적을 만날 때 우리의 불씨는 불꽃이 된다.
40일의 기도로 그들은 불씨에서 불꽃으로 쓰임 받았다.
[히1:7]~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그럼 기도하는 재료는 무엇인가?
그것은 말씀이다.
기도하기 전에 그들은 40일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말씀으로 불씨를 만들고 기도로 불꽃이 된다.
아무리 모세라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지 않으면
그는 실수하고 그의 약함을 드러내게 된다.
40일의 말씀의 재료와 40일의 기도가 만날 때 뜨거운 불꽃으로 살게 된다.
이 불꽃이 된 사역자가 전하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설교의 진정한 목표는 나를 통하여 성도들이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그분 앞에 서는 것과 그분의 그 말씀을 전할 때
나의 설교 위에 부으시는 성령의 위엄과 능력이다.
이것은 아무나에게 오는 것은 아니다.
철저한 외로움의 광야를 지나야 한다.
외로움 가운데 홀로 하나님의 존전 앞에 서야 그것이 가능하다.
세상에 소망이 없어야 온다.
세상에 것에 미련이 있다면 하나님을 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외로움과 세상의 소망 없을을 알게 하신다.
거룩한 외로움을 지나야 나는 거룩한 말씀의 대언자가 될 수 있다.
그 시간을 지날때 거룩의 광채가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광야를 지나야 한다는 것이다.
모세는 외로운 줄다리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말씀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40년을 지치지 않고 불꽃을 살다 간다.
예수님은 광야를 지나 하늘로부터 소리를 듣고 그리고 산상보훈을 전하실 때
수많은 무리가 그 말씀의 권세에 놀라 했다.
세례요한은 광야의 빈들에서 외롭게 삼 십년을 지냈다.
그리고 오직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말씀으로 이스라엘을 회개시켰다.
사도요한 또한 밧모섬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외로움의 깊은 터널을 지나
마지막 될 일을 보는 영광을 누리고 말씀을 전하는 축복을 누렸다.
빛은 광야에서 온다.
외로운 광야, 죽도록 외로운 광야를 거쳐야 영광스런 빛이 임한다.
불꽃은 하늘이 열릴 때이다.
우리는 광야를 지나야 거룩의 존전 앞에 선다.
그것이 두려운 것은 우리가 세상의 것에 발을 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함을 포기하고 하늘의 거룩을 위해 불꽃가슴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오늘 그 거룩한 불꽃으로 나를 초대하신다.
말씀을 주시고 이제 기도로 채우라 하신다.
기도와 말씀의 광야를 지나 그분의 거룩한 불꽃으로 오라 하신다.
왜 육체의 한계를 이기지 못하는가?
그것은 영혼의 깊은 극락을 경험하지 못해서 그렇다.
육체를 넘어서는,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혼의 불꽃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만 온다.
하나님을 만나므로 오는 거룩한 타오름이 내 안에 불꽃처럼 타오르기를 기도한다.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내게 임한 근심 같은 근심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위에서부터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애1:12-13)
하나님의 사역자가 그분의 손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하나님의 교회는 소망이 없다.
일을 하기 전에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의 성패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
시대와 교회를 바라보며 눈물이 있어야 한다.
교회가 타락하고 시대가 악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시고
하나님이 아파하기 때문에 울어야 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시니 나도 우는 것이다.
그 마음을 나는 느끼고 있는가?
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영혼을 부여잡고 아파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보다 그들을 하나님의 존 전 앞으로 인도하고 싶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함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고 싶다.
비전은 내려 놓을 때 진정한 비전이 보인다.
하나님을 만날때 하나님은 하늘로부터의 새로운 비전을 주실 것이다.
비전은 나에게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시대를 향하여 울어라
그리고 그것을 넘어 내 안에 불꽃처럼 타오르는
하나님의 불이 없음으로 울어야 한다.
그래서 나의 비전은
교회를 세우는 것도,
복음을 전하는 것도 아니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이 내 안에 먼저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나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참 은혜는 하나님 앞에 서있는 자신의 부족 때문에 목말라하고 고통 하는 시간을 보내야 온다.
변화된 역사에는 변화된 설교와 사역이 있었고,
변화된 설교와 사역 뒤에는
변화된 설교자와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변화된 언어와 변화된 그들의 삶으로 불붙은 삶이 있었다.
주여 나를 붙잡으소서!